연중 24주일

2012. 9. 16. 오전 11:52:22

글자

연중 24주일미사. 이사야 50,5-9;야고보 2,14-18; 마르 8,27-35

 찬미 예수님 일주일동안 교우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살았습니다. 친한 사람도 있고 그 중에는 더 가까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계시는 지 목록을 작성해 볼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몇 개쯤은 쉽게 나열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친하게 같이 지낸 시간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5개쯤 넘어서면서 가물가물해진다면 과연 가까운 우정이었나 고개가 갸우뚱 해집니다. 그렇다면 정말 알아야 할 분인 하느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요.

 

처음에 믿음을 갖고 기도를 하면서, 좋은 체험담을 얘기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묵주기도를 하는데 장미꽃 향기를 맡았다, 갑자기 뜨거운 무언가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나도 모르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봐왔던 똑같은 것이었지만 그날따라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보이더라 등. 그런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으면 많은 감사를 드리고 기뻐하는데요. 그런데 기도에 대한 이런 좋은 선물이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그런 좋은 것들을 주십니다.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서이지요. 그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맛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맛을 거둬 가십니다. 마치 대 데레사가 처음에는 기도가 너무 잘 되어서 수녀원에 들어갔었는데, 그 이후 7년 가량을 마치 사막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말처럼, 당신은 더 큰 맛을 주시기 위해 철저히 그 맛을 거둬가십니다. 내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여러분은 견디실 수 있겠습니까? 버틸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린 하느님이 과연 어떤 분인가? 다시 쳐다보게 되는데요.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동안 자기들이 들은 얘기들을 늘어놓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풍문으로 들은 남에게서 들은 얘기들입니다. 당연히 자기가 고백한 하느님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물어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네는 제자들이니까 나에 대해서 가까이 봤으니 얘기해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베드로가 불쑥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이는 불완전한 고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어서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고 부활하게 된다는 얘기를 듣자 ‘안됩니다’ 는 말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건간에 내가 바라는 것과 다르다면 여러분은 어떻하시겠습니까? 이제부터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믿겠다고 오늘도 성당에 나와 있지만 과연 나는 얼마나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단순히 나의 소원을 빌기위해 오신 분이라 하더라도, 소원을 들어 줄 그 분의 성향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느님이 주시는 맛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겨워도 오늘 1독서에 말씀처럼 삽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마치 부모가 멀리 있다 해도, 돌봐주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맛에만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당장 어려움이 오면 견디어 내질 못합니다. 둘이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사랑하는 수유동 본당 교우 여러분

나에게 닥친 문제가 안 풀릴 때, 가끔 바람쐬고 다시 들여다 본다던가, 멀찍이 놓고 볼 때 답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린 문제를 풀겠다고 너무 현실과 딱 붙어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도 그렇게 쳐다볼 때 보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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