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성모신심 미사. 묵시록 21,1-5; 루카 1,26-38
간혹 부모님들이 푸념하면서 저에게 다가옵니다. 다 큰 아들이, 다 큰 딸이 결혼도 안 하고 그 모양으로 살고 있다고요. 좀 갔으면 좋겠는데, 좀 가서 엄마의 마지막 숙제를 끝내줬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도대체 엄마의 숙제를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자녀들의 입장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도 실상은 이성과 사귀며 진도가 나가길 진심으로 원합니다. 하지만 항상 정식으로 사귀려는 무렵, 다가오는 두려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남성들이 여성에게 ‘사귀자, 좋아한다’ 고 고백을 했는데 혹시 자기를 퇴짜놓을까봐 두려워하는, 이른바 거절에 대한 공포가 있고요. 여성들은 마음을 받아줘서 그 남자와 사귀기 시작했는데, 혹시 자기를 버리고 돌아서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까봐 두려움에 떠는, 유기공포가 있다고 합니다. 이 두 경우에 닥치게 되면 이른바 자기 인생은 끝났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뭡니까? 바로 동성친구와 재미있게 노는 것입니다. 새로운 상대를 만나 데이트를 해야 하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요. 매 번 반복되는 데이트의 따분한 방식, ‘우리 이제 뭐하지?’ 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맘 편한 동성친구와 술 먹거나 수다 떠는 것을 더 즐겨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이런 세계관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진정 만나야 할 큰 세계와의 만남을 거부하는 꼴이 되어 참된 어른이 되지 못하게 되는데요.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좌에 앉아계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지금 만난 세계는 이전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오직 주님의 질서에 의해 건설된 새로운 나라입니다. 실로 부활의 나라입니다. 당연히 예전 갖고 있던 것들과 단절이 되어야 만날 수 있는 나라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모님도 새로운 세계에 문에 다다랐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성모님은 결단의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 천사의 말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내가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사느냐? 내가 살던 방식으로 살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어떤 다른 여자가 성모님이 되어 예수님을 낳을 테니까요. 당장은 편해 보입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새로운 비약은 없습니다. 그저 지금의 시간의 도돌이표만 찍을 뿐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부담감입니다. 누가 부담을 안겨주면 어떻게든 손사래를 치고 도망가기 바쁩니다. 그래서 10월이 가까이 오면 분명 각 단체의 인사가 단행될 텐데요. 아마 제가 예상하기에 어디에서 두어 달 몸져 누워있다 오시거나, 여행 등의 방편을 쓰실 지도 모르겠는데요. 다른 본당에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교리 선생님이 이제 교감을 할 때가 왔습니다. 할 순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답니다. 여러 핑계를 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저는 나직이 이 한 마디만 했습니다. “지금 선생님 나이에 어디 가서 이만한 요직에 앉아, 백 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부릴 수 있겠어요?”
앞서 미혼자들이 새로운 연애를 하고 싶지만, 넘어야만 하는 그 두려움이 무서워 감히 시도조차 안하거나 예전에 겪었던 트라우마(trauma)를 되새기며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얘기는, 그저 우리 자녀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고스란히 내 얘기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매 번 기회는 찾아오고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그동안 봉사자 역할을 해 왔던 많은 교우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시간은 은총이었습니다.” 라고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만이, 물 속에서 노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