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고린1서 8,1-13;루카 6,27-38
어떤 신부님이 새롭게 성당에 부임해 오셨답니다. 당연히 많은 신자들과 가정방문 및 만남을 가진 후, 몇 달 가량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신부님의 강론이 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매일 매일의 강론이 똑같았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 다음 날도 2주간을 복음의 내용과 아무 관계없이 똑같은 내용만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계속 되풀이 하더랍니다. 슬슬 신자들 사이에도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참다못한 어떤 신자는 미사 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까지 하더랍니다. 이에 사목회장이 슬그머니 나서서 신부님께 한 말씀 드렸답니다. “신부님. 같은 강론이 며칠 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강론 언제까지 이렇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이에 신부님이 이렇게 답하더랍니다. “우리 신자들이 모두 실천에 옮길 때까지요.”
여러분은 그동안 좋은 강론, 강의 참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들으면서 속이 시원해지기도 하셨고, 고개를 끄덕일 때도 많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 신부님들이 깨달은 이야기지, 내 얘기는 아닙니다. 가끔 우리가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책을 읽고 난 후, 그 내용을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마치 내가 그것을 지어낸 것인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하지만 실제의 내 모습은 마치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옮기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데서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여라, ~해주어라’ 를 계속 반복합니다. 즉 실천이 필요한 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떻습니까? 말은 번드르르 하지만 ,생각은 금쪽같지만, 실천이라는 문턱을 못 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참되게 안다.’ 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두뇌로 무엇을 분별하고 인식하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다는 말이 덫이 되고 함정이 되는 건, 머리로만 인식하기에 그렇잖습니까?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이 그저 말 뿐인 사람이었다면 성인이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행과 수덕생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호사업도 폈다는데요. 이제 우리도 무언가를 할 때입니다. 뭘 해야 좋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