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3주일. 이사야 35,4-7ㄴ.야고보 2,1-5. 마르코 7,31-37
찬미 예수님. 일주일동안 교우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여러분께 질문 하나 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남들과 매일매일 비교 되면서 삽니다. 그야말로 경쟁구도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찌부러지지 않고 버티면서 살 수 있는 그 무엇을 한 문장으로 한 번 나타내보십시오.’ 라고 질문을 던져본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내가 찌부러지지 않고 버티면서 살 수 있는 그 무엇이.. 하느님이요? 예수님이요? 그건 모범답안이구요. 여기서 제가 원하는 답은, 내가 무심코 내뱉는 지극히 세속적인 답을 말하는 것입니다. 뭘까요? 어쩌면 이런 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니가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 나아.. 너처럼은 살지 않을 꺼거든.” 비록 비교대상이 되어 내가 위축될 지라도, ‘내가 너보다 낫다.’ 라는 말을 하면서 나를 위로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낫다’ 고 내뱉으며 살아보지만 실제 내 모양새는 가난합니다.
이 가난은 다양한 모양새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병원에 가도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을 갖고 있다든지, 상대적인 빈곤상태라든지, 성격에 문제가 있다든지, 마음 씀씀이가 옹졸하여 ‘나’ 만 아는 이기주의라든지, 이렇듯 각자 남에게 말 못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병들을 하나씩 갖고 삽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잘 아는 누군가가 “당신은 가난하시군요?” 라는 말을 하면 몹시 기분 나빠 합니다. 아무리 그 말이 진실이라도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사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하느님께 의지하러 지금 성당에 오신 것만 보더라도 ‘내가 가진 힘만으로는 안 되는구나.’ 는 사실을 나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남의 가난은 보면서도, 나의 가난은 무조건 빨리 탈출해야 한다는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랬기에 참 가난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 무슨 의미인지 살피기보다 그저 피하고, 빠져나갈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배워왔으니까요. 그래서 세상은 빠른 대처 방안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장점도 있었지만 실제로 고통이 주는 의미는 철저히 배제되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 배제된 것입니다. 꽃이 피기 위해 씨앗이 땅에 묻혀 있어야만 한다는 것, 병이 낫기 위해 고통이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부활이 있기 위해 사순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 내 얘기는 아니기를 무조건 지나가 주기만을 바랐던 것이 바로 가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병이 낫고 나서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실제 그 사람은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더 널리 알렸다.” 라고 나옵니다.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벌어진 상태가 너무 놀라워 기쁨의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습니다. 알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그저 나의 가난상태를 받아들이라고만 얘기합니다. 그것이 행복이라고요. 하지만 우린 그 가난의 상태가 오히려 희망이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가진 부족함을 가지고 당신께 매달릴 때 기적이 벌어지니 말입니다. 이렇게 우린 기적을 체험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기적이 언제 올 지 모르지만, 꽃이 피기위해 씨앗이 땅에 묻혀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 필요하듯, 부활이 있기 위해서 고통의 기간이 있어야만 하듯, 그 시간이 지나면 1독서의 말씀처럼 “그 때에.. 눈 먼이들이 열리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는 말씀이 곧 내 얘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수유동 본당 여러분
2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우린 그분께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에파타.. 열려라..” 하는 말씀이 나에게 벌어지도록 나의 현실 속에서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