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5주간 토요일

2012. 7. 20. 오후 10: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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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5주간 토요일

제 성격상 제가 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고 싶은 사람은 아닙니다만 오늘 복음을 읽으며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잠시 소개를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재속 사제회인 프라도 사제회에서 작년 4월에 유기서원을 하였습니다. 프라도 사제회는 복자이신 앙트완느 슈브리에 신부님이 세우신 재속 사제회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복음화 하기 위해 세운 곳입니다. 그 성격은 복음연구 통해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전부로 여기며 관찰, 판단, 실천을 통한 사도적인 성찰, 그리고 구유, 감실, 십자가를 통해 사제는 헐벗은 사람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고, 맛있는 빵으로 먹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사제의 부르심 속에 더 깊은 부르심으로을 들어가고자 이 서약의 삶을 택했는데요 잘 살고 싶어서요. 그런데 생각보다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것을 과연 어떻게 넘어서야 할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를 견디려는 모습이 세상 공부를 했다는 우리 눈에는 좀 바보같고, 미덥지 않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라고 하고 있으니 뭘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인지 답답해 보여 실제로는 이 방법대로 안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전 총장 신부님이 프라도 회원들을 위해 피정을 시키면서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 장애물을 어떻게 이겨야 합니까?’ 하고요. 그러자 그 분은 세 가지 장애물이 있다면서 그 분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애착이 있어야 한다. 만약 다른 애착이 생기면 거기서부터 이미 마음은 갈라지게 된다. 그것은 우상과도 같은데 이는 그리스도와 멀어진다. 신학생들을 보면 인터넷이나 휴대전화가 이에 해당한다. 이런 우상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이런 우상은 자유를 빼앗아 가 버리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를 속박시킨다. 이것이 첫째 장애물이다.

  둘째. 추론이다. 하느님, 복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여 무언가를 숙고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관점을 고려치 않고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해보려는 시도가 이런 경우다. 새로운 환경 하에서 새롭게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려고 해야만 한다. 기도도 않고 복음연구도 않으면서 내가 세운 계획을 계획하는 것이 두 번째 장애물이다.

  셋째. 두려움이다.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내 몸과 마음이 울부짖는다.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경기를 일으킨다. 종신 서약을 앞두고도 용기를 잃는 경우를 본다. 슈브리에 신부님의 저서인 “참다운 제자” 에서 ‘바보가 필요하다면 여기 있습니다.’ 는 말이 있다. 자신의 비참함만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봐야한다. 하느님의 위대하심, 자신의 소명과 사명,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 사이에서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상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한 걸음씩 나가야 한다. 제자로서의 삶은 이 세 가지를 경계하고 살아야 한다. 마지막 세 번째인 두려움은 신앙심과 연결된다. 그 분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는가?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신앙인인가? 봐야 한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읽어 본 우린 잘 압니다. 예수님의 방식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말입니다. 실상은 예수님의 방식대로 하겠다고 해놓고 실상 그 상황이 닥치면 내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현실을 말입니다. 믿음은 온데간데 없고, 안전빵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배운 방식을 찾아내기에 급급합니다.

우린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는 사람일까요? 그분의 방식에 어느 정도 신뢰하는 이라고 자신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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