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4주간 목요일. 호세아 11,1-9;마태오 10,7-15
어제 성서 백주간 1기 팀이 종강모임을 가졌습니다. 3년 반 동안의 기간 동안 신구약을 읽고 쓰고 묵상하면서 많은 체험담을 서로 나눈 시간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게 긴 기간 동안 끈기를 가지고 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자랑스럽고 기쁜 모습의 한 켠에 왠지 모를 무거움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이끄시려 먼저 당신의 맛을 보여주셨고 거기에 합당하게 따르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앞으로의 길이 예전 같은 비단길의 연속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더 성장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 하느님은 아이였던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이집트에서 불러내시고 걸음마도 가르쳐주시고, 팔로 안아도 주시고 볼도 비비고 먹여도 주시지만 그들은 오히려 우상들에게 향을 피웁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를 보면서 이런 것이 떠올랐습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전에 보지 못한 깊고도 새로운 하느님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새 느낌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예전 같던 따사로운 맛도 못 느낄 수 있고, 달콤한 맛도 거두어 가십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오히려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데요. 그 때가 더 좋았다고 여기면서 말이지요. 이렇게 되다보면 그 기도는 살아있는 기도가 아닌, 습관적인 죽은 기도가 되어버립니다.
예전 고대의 사막의 수도승인 에바그리우스는 153항에 걸쳐 ‘기도론’ 을 작성합니다. 거기 보면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당신이 형제들과 기도하든지, 혹은 혼자 기도하든지 간에,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깨달음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노력하십시오.” 하고요. 면담을 하다보면 많은 교우분들이 멈춰지고 정체된 삶을 사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 중에 하나가, 기도를 하긴 하지만, 마치 숙제를 끝내는 듯이 해치우는 것처럼 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을 봅니다. 빠르게 하더라도 새기면서 해야겠지요. 짧은 염경기도라도 ‘내가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가?’ 잘 되새겨 볼 때, 하고 있는 지금의 이 기도, 깊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