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1주일미사. 에제키엘 17,22-24; 고린토2서 5,6-10; 마르코 4,26-34
찬미 예수님. 일주일동안 교우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20세기의 영성가라고 불리운 토마스 머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개신교도로 살았지만 여러 계기를 통해 트리피스트 수도회의 수사이면서 신부로 살면서 그 유명한 ‘칠층산’ 이라는 자전적인 책을 쓰는데요. 그런 그가 사제서품을 받기 2일 전 일기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적어도 사제가 된다는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강론과 지도를 잘하고 재능을 발휘하며 격려한다 해도, 사람들에게 실제로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기에 우리가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모든 선교 활동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것은 미사 안으로 자취를 감춘다. 하느님은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다고 하신 성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는 제단에 설 것이다.”
쉽게 말해 이렇습니다. 그동안 본인이 신부님이 되려고 마음을 먹고 이제 이틀 후면 사제서품을 받지만, 실상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너무나도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자기를 위축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더 작게 될 때, 실제로 미사 속에 녹아든 나를 하느님께서 더 크게 키워주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제단에 서서 미사를 드리게 됨을 감사하며 잘 받아들이겠다는 뜻인데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고 하십니다. 게다가 1독서에서 하느님은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면서 강한 것들과 큰 것에서 선택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작고 미천한 것에서 시작을 하십니다. 마치 구유에서 예수님의 인생이 시작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실상 많은 사람들의 거의 대다수가 큰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 오래 머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언제나 늘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자리를 비켜줘야 하고, 그동안 애써 세워놓았던 것들이 누군가에 의해 허물어집니다. 또 그 허물어지는 것을 내가 목격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가슴 아파 합니다. 이런 것들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붙잡아야 하겠습니까? 마음 아프지 않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 변치 않는 그 무엇을 붙잡아야 하겠습니까?
예전에는 나 자신이 힘 있는 사람으로 알았고, 그런 힘을 부리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힘을 가지고 여러 가지 봉사도 해봤습니다. 게다가 능력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움직이신다는 느낌.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무능력이 오히려 나를 그분께 점진적으로 젖어들게 만들어줍니다. 이런 어깨에 힘 빼는 작업이, 나를 가득 채워주면서 내가 전에 보지 못한 방향을 보게 인도하십니다. 뭔가 나의 계획대로 하고자 했다면, 욕심대로 움직였다면..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이 좋지 않은 표양으로 나를 기억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용히 있으면서 그분께 집중했을 때 내가 생각한 방향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이미 체험을 했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들어봅니다. 겉보기로는 무능력자라고 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실로 엄청난 활력의 에너지가 살아 숨 쉬면서 적절한 때에 그것이 발휘되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2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믿음과 어떤 확신으로 차 움직이고 계십니까? 이젠 그 믿음과 확신의 정체에 대해서... 나 자신이 대답해 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