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신부 : 여러분께 인사드릴께요. 저는 스테파노 신부님입니다. 아까 말씀드렸 듯이 여 러분의 신부님께서 피정을 가셔서 제가 오늘 미사를 집전하 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만 강론하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친구 한 명 데려왔는데 괜찮겠죠? 야~ 봉달아 인사드려라
봉달 : 안녕하세요. 저는 봉달이라고 해요. 와~ 수유동 성당에 처음 왔는데 이햐~ 친구들이 참 많네요.. 반가워요..
신부 :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인데 봉달이는 삼위일체가 뭔지 아니?
봉달 : 어~~ 듣긴 들었어요..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의 개별적으로 다른 분이지만 결국 한 분이다.’ 라는 어려운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솔직 히 말씀드려서 잘 못 믿겠어요. 좀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안되 요? 제가 학교에서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배워서 말이지요..
신부 : 그래~ 봉달이는 과학적인 것 좋아하는구나. 과학은 무언가를 얘기하 기에 앞서서 증명이나 증거를 내놓아야 하죠? 그럼 뭐 하나 물어봐 도 되지?
봉달 : 오! No Problem~ 뭐든지 물어보세요.
신부 : 봉달이가 이제껏 살면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니?
봉달 : 당근 빠따 엄마요..
신부 : 그럼 엄마를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해봐~
봉달 : 어...어.. 사랑은 안 보이는 거잖아요?
신부 : 그러니까.. 안 보이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는 게 과학 아냐?
봉달 : 잘 모르겠어요...
신부 : 세상에는 과학으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아직도 너무 많아요.
물론 세상에는 과학이 필요해요. 과학이 그동안 종교가 말해왔던 것 들을 설명해주고 있잖아요? 하지만 과학자 중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직도 과학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얘 기하고 있는 것이죠. 삼위일체도 그래요.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의 다른 역할을 하시지만 또한 한 분이라는 사실 속에서 하느님은 우리 가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는 초월적인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실 수 있는 거예요.
봉달 : 아 ~ 그러니까 하느님을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끌어내려서 이해하 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씀이군요. 주님은 내가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너머서 오시니까요.
신부 : 그렇지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도 그렇고, 엄마가 봉달이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그렇고, 말로나 증거로는 얘기할 수 없는 그 무 엇이 있는 것이죠. 하느님의 것을 인정해 드릴 때 주님의 뜻이 무언가 알아들을 수 있을꺼에요.
봉달 : 알겠어요. 여러분도 생활 중에서 성부,성자,성령이 내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잘 관찰하고 체험하도록 해요. 안녕~
=============================================================================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은 신부님들이 제일 강론하기 어려워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믿을 교리’ 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라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의 고유한 위격(位格)을 지니면서 동시에 한 분이라는 교리이기에 신부님들은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하십니다. “자 여러분 이 신비는 우리의 언어를 넘어서는 부분이기 때문에,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씀드리면 굉장히 답답하실 것입니다. 신부도 모른다고 하니 힘빠지시죠? 그동안 이를 설명한답시고 여러 가지의 예를 들어왔습니다만, 이런 설명에는 다 한계가 있어왔고요.만족스럽지 않았으며 이단으로 빠지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주에서만 하느님을 이해하려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당장 알아듣기 힘들기에 전원 스위치를 꺼버리듯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 무관심해야 할까요? 누르듯 하느님의 신비를 꺼버립니다. 왜냐하면 알아듣지 못한다고 여기니까요. 아니면 내가 못 알아듣는다고 그 분의 신비가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우리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 상영한 영화가 있습니다. 종교영화는 아닙니다. 예전 ‘코스모스’ 란 책의 작가 칼 세이건이 저술하고 조디 포스터가 97년에 주연한 콘택트란 영화가 있습니다. 엄마가 없던 주인공 엘리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어릴 때부터 아빠와 함께 무선통신과 천체 관측을 합니다. 하지만 아빠마저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뜨게되자 그녀는 모든 진리의 절대적인 해답은 과학에 있다고 믿으며 별을 좇는 과학자가 됩니다. 그러다 갑자기 26억 광년이나 떨어진 베가성의 메시지를 듣게 되고요. 그 신호 안에는 베가성으로 갈 수 있는 우주선 설계도가 담겨 있었기에 그 설계도를 기반으로 외계로 가게 됩니다. 18시간 동안 차원을 이동하여 가게 된 혹성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보게 되고, 외계인은 주인공이 놀라지 않도록 죽은 아빠의 형상을 통하여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그렇게 하여 지구에 돌아오지만 지구에서 보기에는 수 초 만에 우주비행이 불발로 끝났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당연히그녀는 자신이 우주비행을 했다고 주장을 하지만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곧 이어진 재판을 통하여 외계에 갔다지만 아무런 과학적 증거도 제시할 수 없던 주인공은, 자신이 평소 신을 믿지 않았던 과학자였지만 분명 체험을 했다고 외칩니다. 이후 화면은 바뀌며 주인공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고요. 정치적인 파장을 두려워했던 백악관은 사실 우주여행 출발 때에 그녀 머리에 씌워 놓았던 비디오 카메라에 녹화된 화면에는 아무 것도 찍히지 않았지만, 18시간 가량의 시간동안 무언가가 녹화되었었다는 사실을 그냥 묻어버리린 채 영화는 끝나는데요.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장으로 주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시는 장면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부활을 보았음에도 이런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마치 우리들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믿는다고 이 시간에 성당에 나와 있지만, 실은 주님에 대해 열정적으로 믿지는 못하는 모습 말입니다. 아직도 무언가 봐야 믿음이 간다는 이 솔직한 모습 말입니다. 의심하는 게 잘못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나의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끌려 다니는 듯한 신앙의 상태가 안타까워 드리는 말씀입니다. 욥기 마지막에 보면 하느님이 욥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보고 심연의 밑바닥까지 걸어 보았느냐?” 그 곳이 있긴 하겠지만 내가 만난 적은 없지요. 아직도 내가 알 수 없는 구석이 많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느님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해도 불완전한 설명일 수밖에 없음을 우린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수유동 본당 교우 여러분~
중세 철학자요 신학자인 성 안셀무스가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람은 믿기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고요. 즉 믿음이 선행될 때 이해심이 그제서야 발동된다고요. 예전에도 우리와 똑같이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내놓았던 그의 답을 들으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린 아직도 그 분의 신비에 대해 놀랄 것이 더 많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