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3주간 금요일. 사도 9,1-20;요한 6,52-59
어제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마흔 집을 다녀왔는데요. 가정집 뿐만 아니라 우리 구역 내 신자가 신청하였다면, 다른 구역에 있는 작은 병원, 요양원까지 돌아야 하기 때문에, 나 신부님과 나눠 방문해도 시간이 3시간 반 정도가 걸립니다. 그만큼 동선이 길다는 것이지요. 물론 구역장, 반장님들도 함께 가서 기도해주고 있는데요. 어제 저는 거기서 무언가 느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도착하여 방문한 곳은 방학동 성당 옆에 노인전문병원이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말씀은 못하시지만 그래도 들을 수는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성체는 고사하고 음식물도 넘기기 힘들어 하기에 성체를 아무리 쪼개서 영해 드려도, 영하기 쉽게 입에 물을 계속 떠 넣어 드려도, 넘기기 어렵습니다. 그걸 당신도 알기 때문에 그야말로 모시고 싶어하는 그 애절한 눈동자란 어떻게든 주님의 생명과 닿고 싶어하는, 본인의 안간힘과 은총의 접점이었는데요.
오늘 유다인들이 따집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이냐?” 면서요. 믿고 있다는 우리도 실상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고린토 1서 2장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들의 지혜에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서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요. 우리는 어려운 것을 찾기보다 쉬운 것, 더 혹할 수 있는 것에 끌립니다. 그게 뭡니까? 그건 삶의 테크닉입니다. 삶을 지탱해주는 기초적인 힘보다는 당장 알아챌 수 있는 것들이죠. 그런데 그런 것만 주안점을 두다보면 바탕없는 신앙으로 이어지고, 당연히 ‘희생’이라는 말만 들으면 도망가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도망가면 당장 불은 껐다고 믿지요. 하지만 어디 그렇습니까? 그 잘난 바오로가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믿던 신앙의 실체를 만났기 때문이었고 거기서 행동으로 옮겨졌기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린 오늘도 문제없이 성체를 모실 것입니다. 걸어 나오는데도, 모시는데도 크게 문제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쉽게 모시기에 성당을 나가면서 내가 성체를 영했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쉬운 길만 찾으려는 세태 속에서 나의 신앙은 어떻게 다져왔는가 봐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