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3주일

2012. 3. 10. 오후 12: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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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3주일미사. 탈출기 20,1-17;고린토1서 1,22-25

오래 살다보면 자신만의 스타일이란게 존재합니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이 있기 마련입니다. 살면서 자기가 제일 편하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옳다고 믿었던 것을 행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누가 나서서, 그러지 말라고, 그리 편하게 지내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건 내 삶이니까 신경 꺼’ 하시겠습니까?

프랑스의 복자인 앙트완느 슈브리에 신부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나중에 재속 사제회인 프라도회를 세우는데요. 그분의 저서인 ‘참다운 제자’에 보면 사제의 모습 3유형으로, 즉 나쁜 사제, 좋은 사제, 완전을 지향하는 사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나쁜 사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캔들을 자주 일으키며 죄 중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사는 사람을 말하지요. 좋은 사제는 이렇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알고 있고 바라던 사제상입니다. 사제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교회의 계율을 잘 지키고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치며 대죄와 스캔들을 피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착한 일을 하는,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행실에는 나무랄 것이 없는 사제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완전을 지향하는 사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더 가까이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힘을 기울일 열의를 갖고 있으며,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의 가난과 온화함, 사랑, 영혼에 대한 열성, 그리고 고통과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을 본받기를 원하는 사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좋은 사제와 완전한 사제를 이렇게 구분 짓고 있습니다. ‘좋은 사제와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사제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좋은 사제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 우리 주를 더 가까이 따라가서 그분을 본받으려고 진지하게 힘쓰지 않으며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며 세속과 자기 동료들의 취미에 굳이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완전해지려고 애쓰는 사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을 그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긴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그분을 가장 충실하게 본받으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완전을 지향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지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처럼 착하기만 한 상태를 머물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라고요.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거룩한 사제는 착하기만 한 사제 백 명 보다 더 많은 이를 회개시키고 하느님께 돌아오게 만든다고요. 이 이야기가 그저 신부님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사건을 하나 벌이십니다. 성전정화 사건입니다. 실로 엄청난 파장이요, 입방아에 오를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두려운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분이라고 남의 눈, 인기, 명예, 이런 것 모르셨겠습니까?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버리시며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지만 얼마 전 제가 성지순례를 가보니 예루살렘 성전 주위는 아직도 시장을 방불케 하고 있는데요. 우리 신앙인은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의 방식이 아무리 옳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있다면 이제껏 자신이 세워놓았던 것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요. 그런데 우린 무서워합니다. 마치 자기 생명이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외칩니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라고요.

사랑하는 수유동 본당 여러분!

우린 살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허물어야 할까? 무엇이 아까워서 하지 못하고 있을까? 혹시 그동안 세워두었던 가치관을 더 아까워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분명 우리 눈으로 보기엔 예수님의 방식은 먼 길을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사는 게 뭔지 알면서도 내 방식대로 하다가 후회를 경험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2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라고요. 이제 그분의 정신으로 탈바꿈 해야겠습니다. 매번 같은 죄를 저지르고 고백하는 내 모습, 이제 질리지 않습니까? 그분의 어리석음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그게 살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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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 3주일 미사. 중고생용

찬미 예수님~ 우리 친구들 제가 처음 왔을 때 인사하고 오늘이 처음이네요. 여러분께 뭐 하나 물어보면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남한테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세요? 아니면 누가 보더라도 올바른 사람이 되길 원하세요? 마치 아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것처럼 고르기 힘들지요? 그런데 여러분께 그런 상황은 닥치고야 마는데요. 특히 어떤 단체장이나 무슨 클럽장이 되었을 때 어떤 사안에 대해 분별을 해야 하고 판단을 제대로 해야 하는 때가 오지요?

물론 사람은 단편적인 하나의 모습만 가지지 않습니다. 여러 조화된 모습을 갖고 있지요. 하지만 햄릿형 인간처럼 그저 물렁하게 우유부단하게 살 수 만은 없을 때가 오는데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성전 정화를 하십니다. 그야말로 성전을 뒤엎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버리시며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그런데 재미있는 사항은 예전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간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 곳은 시장판이라는 사실이지요. 뭐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보다 그저 예전에 지나간 예언자쯤으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그분이라고 어떻게 하면 남들이 자기를 좋아할 지 몰랐을까요? 어떻게 하면 인기를 끌 수 있을지 정말 몰랐을까요? 아니지요. 그런데 감행을 하십니다.

 

비슷한 얘기 하나 꺼낼께요. 1826년에 태어나셔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복자품에 오르신 프랑스의 앙트완느 슈브리에 신부님이란 분이 계세요. 이 분이 무슨 얘길 했느냐 하면요. 세상의 신부님의 형태는 3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해요. 나쁜 신부님, 좋은 신부님, 그리고 완전을 지향하는 신부님. 나쁜 신부님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좋은 신부님은 대부분 여러분이 알고 있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그런 신부님이에요. 맡은 바 직분 다하고, 미사와 강론 잘 준비하고 착한 일을 하는, 나무랄 데 없는 신부님이에요. 그럼 완전을 지향하는 신부님은 누구냐 하면요. 오늘 복음처럼 욕도 먹지만 참된 것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나아가는 분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예전 개포동 성당 얘기 하나 할께요. 1980년대에 재건축을 하면서 그 곳 신부님이 지하에 3층에 걸쳐 주차장을 파기로 하셨데요. 요즘이야 지하에 주차장 파는 게 뭐가 대수에요. 근데 시대상 80년대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어요. 주차장은 오직 지상에만 있던 시대였어요. 당연히 모든 신자가 다 반대를 했데요. 하지만 팠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좋아한데요. 비 오는 날 주일학교는 마당이 없으니까 거기서 프로그램 하고 있다 하고요. 오히려 주차난 때문에 2층을 더 팠어야 했다면서 아까워 하더랍니다. 세상에는 이렇듯 선견지명을 가진 분들이 있는데요.

 

세상을 살면서 그저 좋은 게 좋은거야~ 하면서 살 수 있어요. 사람들이 원하는데로 다 맞춰주고요. 인기도 끌고 좋지요. 사람도 몰리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안 그러셨지요. 다른 복음에 보면 제자들에게 3번의 수난예고를 하시지요. 쉽게 말하면 이렇지요. “얘들아 나 이제 십자가에서 죽을꺼야. 그러니까 잘 있어~바이” 제자들이 어떻게 했어요. “안됩니다~” 하면서 100% 반대하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기에 우리가 구원받지요. 만약에 그 길을 안 가셨으면 어땠을까요? 뭐 공자나 맹자처럼 사셨겠지요? 당연히 구원, 그런 것도 없구요. 쉬운 길, 남들이 원하는 데로만 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린 남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심지어 왕따를 당할 위험에 처해도 아무리 생각하고 기도해도 바른 길이라면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전 복음을 전한 사도들이 안전한 길만 다니지 않은 것처럼 말이지요. 나도 지금의 위치에서 어떤 길을 어떻게 가고 있나 잠시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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