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6주간 수요일. 야고보 1,19-27;마르 8,22-26
전문가들이 무언가를 보는 눈은 좀 다른 모양입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거기에서 다른 무언가를 끄집어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쓰윽 지나갔을 것을, 그들은 거기에서 뭔가 보석 같은 것을 발견하는데요. 어쩌면 우리도 신앙을 가진 이유 중에 하나는 무언가를 봤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비신자들이 그냥 자신의 삶에 헉헉대면서, 현실이라는 비닐장판에 딱 붙어서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른다는 푸념만을 해댈 때, 여기 있는 우리는 이 삶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를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찾고 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렴풋하게 뭔가 보는 사람이 우리와 닮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눈 먼 사람이 보이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처음에 손을 얹으실 때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했던 것이 다시 손을 얹으시니 똑똑하게 시력이 회복됩니다. 신앙에도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여기까지 와서 미사를 드린다는 말은 뭔가를 봤다는 말과 일맥상통 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된 자아에 속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1독서에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라는 말씀처럼, 무언가를 들었다고 해서 그게 완전히 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씀만 들었을 뿐, 그게 삶으로 젖어들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젖어들기 위해서는 그것에 흠뻑 빠져들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처음 제대로 배울 때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머리를 물 안으로 깊이 숙입니다. 완전히 물 안으로 들어가 나의 몸을 빠뜨립니다. 그래야 뜨니까요. 거기서 괜히 젖었다고 푸념하는 사람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수영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제대로 보기 위해서, 제대로 된 하느님 사랑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처럼 완전히 하느님께 빠져들어야만 합니다.
이 신앙에 대하여 뭔가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한 번 잘 보십시오. 그들은 이 삶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쓰윽 보거나, 맛만 보았기에 깊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교회의 가르침에 근접하지도 못하는 이야길 꺼내놓고서 다 안다고 이야기 합니다. 용기를 내어 그분께 빠져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에 뜨듯 살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