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주간 금요일

2012. 1. 27. 오후 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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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3주간 금요일.2사무11,1-17;마르 4,26-34

어떤 분이 조선시대 그림이 그려진 화첩을 보다가 볼멘 소리로 이런 말을 한 것을 들었습니다. “외국에는 분재나 화분, 꽃꽂이 기술이 발달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왜 그렇지 못하지?” 라고요. 물론 지금의 우리나라도 꽃꽂이나 분재기술이 발달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집의 창문만 열면 꽃이 피어있고 나무가 가득한 것이 보이는데 집안까지 꼭 들여다 놓을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지.” 라고요. 그렇습니다. 꽃이 이쁘다고 다 꺾어서 내 집에 들여놓을 순 없습니다. 그래봐야 시들 뿐인데요. 게다가 분재라는 것도 참으로 생명훼손이요, 비자연적 발상입니다. 분재재배에 필요한 기술은 식물의 원뿌리를 잘 잘라내는 것입니다. 원뿌리가 잘린 나무는 당연히 그 생명을 잔뿌리에 의존합니다. 그렇게 된 참나무나 소나무, 과일나무들의 원뿌리가 잘리면 고작해야 12내지 18인치 밖에 자라지 못하는데요. 뭔가 왜곡된 생명을 보면서 전 오늘의 다윗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뒤탈을 없애기 위해 한 가정을 파괴합니다. 그게 자신을 살려주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진리는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켜주는 것이었지요. 아무리 밧 세바가 아름다웠더라도 부하의 집안을 생각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을 위해서 밖에서 일한다지만, 실상 나의 모습은 밖의 일을 위해 가정을 희생할 때가 더 많아 보입니다. 밖에서 풀지 못한 일을 부인과 아이에게 풀고, 가족이기에 힘든 자신을 받아주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여기면서 기대하고, 그 기대가 꺾이면 또 화를 내고.. 계속 되풀이 되면서 진정 중요하다고 여긴 가족의 원뿌리는 훼손되고 있는데요.
 
 오늘 복음에 땅에 씨를 뿌려 자라는 장면을 설명하며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 지 모른다.” 맞습니다. 자라는 속도는 너무 더뎌 보이고, 얼마나 큰 열매가 나올 지 쉽게 예상치 못합니다. 하지만 겨자씨처럼 작은 씨라도 기어코 하늘의 새가 깃들만큼 자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중요한 것을 어떻게 지켜주고 있는 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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