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2주간 토요일. 미카 7,14-20;루카 15,1-32
아침부터 정신 번쩍 들게 퀴즈 하나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제 나갑니다. ‘방금 우린 돌아온 아들에 관한 복음을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이 아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느낀 때는 언제가 처음이었을까요? ① 아버지 집에 돌아와 송아지 갈비 한 짝을 뜯고 있었을 때 ② 큰 아들이 샘을 내며 화를 내고 있을 때 ③ 아버지가 기뻐서 입을 맞춰주실 때 ④ 돼지들이 먹을 열매 꼬투리로 배를 채우려 했던 걸 거절당했을 때. 답은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답은 항상 제일 마지막에 들은 것이 답이지요. 돼지가 먹을 사료에라도 입을 대려 하였지만 거절당했을 때, 그는 자기가 돌아갈 곳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 하지요.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죽는구나.”
제가 항상 제대 앞에서 서서 미사를 집전하다보면 보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교우들이 하는 기도손입니다.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그 손 모양은 정말 다양합니다. 물론 교회가 가르쳐 준 스탠다드 한 기도손은 정성스레 합장하고 가슴 위치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좀 다릅니다. 첫영성체 어린이는 그야말로 시킨데로 꼭 그대로 열심히 합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오고 하느님이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이 오는 나이가 되면 슬슬 손은 내려갑니다. 청년쯤 되면 손이 늘어져 있고 거만함은 하늘을 찌릅니다. 젊은데다가 힘도 있으니 하느님께 아쉬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나면 세상이 자기 맘대로 안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다시 손은 모아집니다. 그러다 어르신 때에 이르게 되면 그 합장된 손은 어릴 때의 위치보다 더 높아지고 간절한데요.
이런 관찰을 하면서 전 이것을 느꼈습니다. ‘그 분은 말 없이 기다려주셨구나’ 하고요. 보통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어른들은 무리를 해가며 가르치려 듭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아이는 반발하고 도망가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자신이 체득하면서 느낀 답은 누가 뭐래도 답이라고 여깁니다. 1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도 하느님의 마음처럼 자기 스스로 알게끔 기다려주며 살고 계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