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3주일

2011. 9. 3. 오전 11:24:17

글자

연중 23주일미사. 에제키엘 33,7-9;로마서 13,8-10; 마태오 18,15-20

저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만 여러분도 누군가가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그를 깨우쳐준다고, 바로 잡아준다고, 혼내고, 타이르고 충고하는데 익숙하지 않으셨습니까? 잘못된 점을 알려줘야 한다고 고쳐줘야 그 사람이 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기 300년경부터 사막에서 고행하고 기도하던 사막의 교부들이란 사람들중에 스케티스 사막의 교부인 압바 푀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도 ‘나는 죄 짓지 않았다.’ 하고 부인하더라도 그를 질책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의 용기를 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용기를 잃지 마시오, 형제여! 그러나 앞으로는 당신 자신을 잘 돌보시오.’ 그러면 그대는 그의 영혼이 회개하도록 일깨워 준 것입니다.” 라고요. 매일 고해성사를 주다보니 저도 이와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해하러 오는 교우분들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잘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문턱에서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아마 본인들도 굉장히 답답할 것입니다. 매번 같은 문제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그럼 옆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인들도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예! 맞습니다. 기다려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도 듣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러나 그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라고요. 그래서 그런 지 누군가가 무언가를 잘못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그를 꾸짖고 나무라는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 사람은 진실과 대면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린 상대방의 내적상태와 현재 상태를 고려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그늘진 면을 보고, 자신과 자신이 지은 잘못 사이의 거리감을 확인하면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부드러운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그 부드러움이란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마음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바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부드러운 상태입니다. 상대가 일어설 수 있도록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랑의 시간이, 그 사람을 성장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통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혼낼 때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나이 마흔 살 된 부모가 열 살 된 아이를 책망할 때, 부모는 아이의 현재 상태가 열 살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왜 마흔 살 된 자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느냐면서 혼내는 모습 말입니다. 본인의 시각에 가로막혀 아이는 언제라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아이의 현재성을 망각하고 있는데요. 과연 자기가 자신을 혼낸다면 그렇게 했을까요? 그래서 2독서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모두 이 한 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하는 방배동 본당 교우 여러분!

그러면 진정 사랑을 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화답송에 나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마라.” 우리에게 귀가 두 개가 있듯이, 기도하는 시간은 내가 말하는 시간을 줄여 들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듣는 시간은 곧 다시 말해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기다려 줄 때 나와 그 사람은 지금의 상처에서 회복할 수 있는 기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점 없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내 삶의 유쾌하지 못한 부분을 대면하는 용기를 통해 주님의 따스한 사랑 안으로 다시금 돌아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내 주위에 진실을 마주할 만한 용기 없는 이들이 있다면, 우린 그가 회복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이름으로 ‘마음을 모아 청하는’ 시간을 자주 가질 때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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