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가진 힘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진실을 덮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어왔습니다. 그동안에 우리가 아는 많은 직권자들이 그래왔듯이 그 당시의 직권자인 오늘의 헤로데도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헤로데의 모습은 빌라도의 모습과도 비슷하게 여겨집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군중의 폭동이 두려운 나머지 슬그머니 자신은 이 죽음과 무관하다는 뜻으로 손을 씻었듯이, 마찬가지로 헤로데도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목숨보다 자신의 위신을 더 중시한 모습이 나중에 예수님의 소식을 들으면서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난 것이 아니냐며 두려워 떠는 모습을 우린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헤로데도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평소 직언을 하며 옳은 말을 하는 세례자 요한이 귀찮아 잡아놓기는 하였지만 더 어쩌지 못한 이유는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돌변한 이유는 올바른 것 보다 자신을 더 지키려 했다는데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를 보면서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그가 말한 ‘내 왕국의 절반이라고 주겠다.’ 는 말 속에는 허세도 숨어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약속을 지켜야 되는 때가 오면 가능한 것과 아직은 할 수 없는 것을 분간해야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만 그것을 무조건 덮어버리고 우선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이 더 커 보였던 것이 그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이렇게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직장에서는 상사가 부하에게,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거짓말로 강요한다거나, 이성에 맞지 않은 일을 관철시키는 따위를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지키는 데 급급하기보다 먼저 명확하게 자신의 현재성을 발견할 때, 순간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이웃을 억울하게 몰아가는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