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2주간 화요일

2011. 8. 30. 오전 12: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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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2주간 화요일. 데살1서 5,1-11;루카 4,31-37

 예전 제가 신학생 때, 개신교 신학생들이 신학교에 견학을 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과연 ‘천주교는 어떤 교리를 가르치고 배우는가?’ 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특히 궁금해 했던 사항은 영성생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늘 말씀을 들여다보고 외우면서 사는 이들이건만 그들이 알고 있는 영성생활이란 그저 ‘극기나 금욕’ 에 머물러 있었는데요. 오늘 복음에도 보면 마귀들도 와서 소리 지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고요. 마귀들도 알고 있다는 그분을 좀 더 효과적으로 알아듣게끔 강론이 강의시간은 아니지만 잠시 짧은 강의를 하겠습니다.

 신학이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계시라면, 영성신학은 주님이 주신 계시진리와 개개인의 종교체험을 바탕으로 초자연적인 생활의 본질을 밝히고요. 그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침을 규정하고요. 그래서 영혼들이 시작에서 완성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신학의 한 영역입니다. 물리적인 사람이 초자연에 이르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만 제일 중요한 3단계의 구조인, 정화, 조명, 일치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쉽게 말해 집에 과외선생님을 맞아들인다면, 정화적 자세로 먼저 집안을 치워놓고 시작해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되겠고요. 조명적 자세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의 밝기로 방을 만들고요. 일치적 자세를 통해 선생님과 하나 될 때 그분이 의도한 바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분을 맞이하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한데요.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하느라고 했지만 잘 안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안되는 건 안되는 이유가 있는데요.

  첫째, 기도문의 기계적인 암송과 판에 박힌 기도습관. 둘째-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맡겨야만 한다는 지나친 소극성과 반대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지나친 개인적 노력. 셋째- 기대했던 위안을 보지 못함에서 오는 실망, 또는 실제보다 기도에 더욱 진보했다고 믿는 경솔한 낙관. 넷째- 영적인 탐욕으로 하느님 자체보다는 하느님이 주시는 부분적인 면인 평안만을 찾는데 더 신경을 쓰는 애착성. 다섯째- 특정한 기도방법을 고집하거나 성급하게 방법을 바꾸려는 행위입니다. 영성생활은 살아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이뤄집니다. 그러기에 잘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영성생활의 주도권은 내가 하느님이니까요. 그리고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독서에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했듯이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렸듯이 여러분이 그것을 잘 지키면서 배운 것을 서로에게 알려줄 때 하느님도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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