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4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3,26-33; 요한 14,1-6
청년들을 담당하진 않지만 가끔 재미있는 상황들을 만납니다. 그것은 누가 누구를 사귀고 헤어지는가 하는 문제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전 사실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느냐 하면, 뭔가 가십거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제가 못하는 부분을 그 사람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건데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바래서 생긴 애인 사이, 연인 사이가 되었지만 이 둘이 사랑을 참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남자들은 애인이 생기면 이렇게 해줘야지, 저렇게 해줘야지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이란 것이 자기만족에 그칠 때가 많고요. 또 반대로 여자들은 자기가 바란 기대치 어린 사랑을 그 남자가 채워주지 않는다고 힘들어 하는데요. 급기야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는 상황까지 치닫습니다. 우린 사랑의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폭넓은 사랑을 하다 보면 작은 사랑도 잘 할 수 있는데 실생활은 내 마음이 가르침을 제대로 못받은 것처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그동안 뭘 믿고 있었습니까? 뭘 어떻게 믿고 있었나요? 아이는 엄마가 자기 곁에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잠시 화장실을 갔거나 하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당장에 웁니다.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거나 두려워서 말이지요. 어쩌면 애인 관계나 하느님에 대해서도 이런 유아적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닌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아이가 커 갈수록, 엄마는 뒤에서 바라봐줘야, 아이가 스스로 자기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아이가 크면 잘 간섭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지 않더라도, 홀로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시기에 우릴 떠나십니다. 그렇다면 평소 나와 하느님의 관계에서, 눈에 당장 보이지 않더라도, 평소 밀접한 관계를 잘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 관계가 안 되어 있다면, 칭얼대는 아이나 초보 연애자에 불과할 따름인데요. 오늘 화답송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를 낳으신 분이 우리를 그저 방치하겠습니까? 무관심하시겠습니까? 나는 그분을 어떻게 믿고 있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