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수요일. 이사야 50,4-9;마태오 26,14-25
예전 안성기 주연의 영화까지 나왔던 ‘영원한 제국’이라는 소설의 원작자인 이인화 작가의 초기작품에 이런 제목의 소설이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요. 사실 이 제목은 세익스피어의 ‘리어왕’ 1막 4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느냐?’ 라는 대사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소설의 작품 속 인물들은 자아 탐색에 대한 어떠한 열망도, 자아 찾기의 여하한 욕망도 드러내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찾아야 할 자아란 것이 과연 실재하는가? 하는 의문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참 자아와 실재와의 환상을 담고 있는 소설을 읽으며 문득 우린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바라보기를 대단히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별로 그렇게 내세울 것이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기에 창피한 나머지, 남에게 이를 감추려 화장을 많이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되고 싶거나, 보고 싶은 나만을 내가 만들기에 누가 나에게 ‘너는 말야.. 이러이러한 모습이 있어’ 라고 누가 이야기하면 버럭 화를 내거나 아니라면서 손사래치며 부정하는 자신을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 유다도 그랬지 않습니까?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요.
주님의 사순절 기간 복음에 보면 많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배반하는 제자들, 하느님을 섬긴다며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율법학자들, 풀어줄 수 있었지만 자기 자리를 더 생각해, 이 문제를 덮어버렸던 빌라도, 고통스런 예수님을 바라보며 울었던 많은 여인들, 이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신 성모님,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묵묵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여러분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어느 쪽에 더 가까우십니까?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자세는 주님 수난에 동참하겠다는 자세가 아닌, 그저 관찰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관찰자는 체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감정없이 지켜볼 뿐이니까요. 하지만 우린 뜨겁게 이 모든 상황에 참여하여 내가 어디 속해 있는가? 봐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 이 수난은, 2천년 전 상황이 아닌, 현실화 된 오늘의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때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