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5주간 수요일. 다니엘 3,14-95;요한 8,31-42
교우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참 곤란해 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십니다. “요사이 기도생활은 잘하고 계십니까?” 왜 난감해 하실까요? 그 이유가 혹시 기도의 횟수와 시간을 늘여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은 아닙니까? 하지만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분과의 관계성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한데요.
오늘 복음에 유다인들이 따집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사실 그 말이 맞습니다. 종노릇한 적 없습니다. 자유롭게 사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이 되려고 한 이유,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더 잘 살고 싶어서 말이죠. 현세의 삶을 너머서는 초월의 삶을 살고 싶어서요. 그런데 막상 세례를 받고 보니 이건 제약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주일에는 미사에 나와야 하고, 예전보다 착하게 살아야 하고, 매일 하는 기도도 부담감으로 다가옵니다.
도덕경 52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구멍을 막고 문을 잠그면 종신토록 고단하지 않으나, 구멍을 열고 일을 보태면 종신토록 구제받을 길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구멍을 연다는 뜻은, 감각에 사로잡혀 산다는 말입니다. 구멍을 막고 문을 잠그면 고단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데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물 자체가 되라는 뜻인데요. 즉 사물을 볼 때 자기와 동떨어진 대상으로 보지 말고 그것과 일체가 되라는 말입니다. 난초를 볼 때도 관찰자의 입장이 아닌, 아예 난초가 되어 보라는 것입니다. 14세기의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하느님도 끼어들지 않아야 한다고요.’
독서 말씀에 불 속에 던져진 이가 다치지 않았다는 말씀도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를 하면서 ‘아~ 내가 기도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조차 없을 때, 참다운 기도생활이 되고, 그것이 나를 제대로 된 생활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마치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조차 없는 자연스런 경지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찾는 참 자유입니다. 뭘 해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는 삶,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닌 삶, 그럴 때 그 분과의 일치된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