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3 주간 목요일. 예레미아 7,23-28; 루카 11,14-23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죄가 무엇입니까? ‘인류의 조상들이 지은 죄’ 라고 교리서에는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였다는 설명도 덧붙여지고 있는데요.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그 당시 사람들의 잘못인데 왜 나까지 무슨 업보마냥 뒤집어 써서 죽어야만 하지?’ 하는 의문도 들 법합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그런 모습이 나에게도 내재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마태오 복음 11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과연 오늘 독서 말씀에도 나오듯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고요.
조선 명종 때 사람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신흠이라는 사람이 얘기합니다. ‘군자가 소인을 다스리는 건 언제나 느슨하게 보인다. 그래서 소인은 틈을 엿보아 다시 일어난다. 소인이 군자를 다루는 것은 늘 무자비하다. 그래서 군자의 모습을 남김없이 일망타진한다. 쇠미한 세상에 소인을 제거하는 것도 소인의 몫이다. 한 소인이 물러나면 다른 소인이 치고 나온다. 이기고 지는 것은 모두 소인들뿐이다.’ 고요. 즉 소인들끼리 치고받고 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세상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간혹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이 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소인을 사랑으로 감싸안고 함께 가려 하기에, 결국에는 소인의 책략에 희생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나중에는 소인들끼리 남게되어 자기들끼리 자리를 빼앗고 뺏기고 있습니다. 잔머리를 굴리는 일을 마치 국가를 위한 책략으로 말하고, 남 해치는 것도 나라의 우환을 제거키 위한 충정으로 미화하다보니 결국 그 싸움에서 이긴 자도, 진 자도 모두 소인이 되고 맙니다. 똑같은 놈들이 똑같은 짓만 되풀이 하다보니 끝내 서로 같이 망하지요. 복음에 어떤 이가 예수님을 보고 이런 말을 합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쫒아낸다.” 고요. 허위와 거짓으로 주님을 매도하고 이 세상이 자기네 세상인양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세상을 빼앗으려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맙니다.
오늘도 원죄는 살아있습니다. 하늘나라를 빼앗으려 드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고 있는 지, 다시 한 번 봐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