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 미사.(해외원조주일)요나3,1-5.10;고린토1서7,29-31;마르코1,14-20
찬미 예수님 일주일 동안 교우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매일 우리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관계를 맺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왜 저 사람은 나 같이 생각을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와 내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머리로선 인정하지만 실제로 부딪히게 되면 그렇지 않다는 사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정작 남이 달라지기 원하면서 자기 자신은 그대로이길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오늘 1독서에 요나는 하느님의 명을 받고 네네베로 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만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고요. 재미있는 것은 이 말을 듣고 성경에서는 그들이 곧바로 하느님을 믿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서술적인 특성상 전개에 따르는 여러 상황을 생략하기에 그렇게 서술하였겠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백성들이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시자 그들의 밥줄인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제일 중요한 생계를 버릴 수 있었던 그들의 속사정은 무엇이라 여기십니까?
예전에 본 영화중에 임권택 감독의 작품인 ‘취화선’ 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조선 말기의 화가로 안견,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3대 화가로 꼽히는 오원 장승업의 생애를 그린 영화입니다. 거기서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요. 장승업의 스승 역할을 한 안성기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림이 참 좋구나. 하지만 이제는 네 숨결과 혼백이 살아있는 너만의 그림을 그려야 할 때가 아니더냐?” 하자 장승업의 역할을 맡은 최민식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달라지고 싶습니다. 정말 달라지고 싶습니다. 항상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아주 피가 끓습니다.” 라고요. 본인의 그림이 그저 남의 화풍을 카피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 때, 창작을 해야만 하는 예술가는 죽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인데요. 바로 그러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항상 달라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삽니다. 그래야 자신이 살고 있는 의미를 찾습니다. 여기 모여 있는 우리는 예술을 창작하진 않지만 나의 삶은 창작할 수는 있습니다. 나의 삶이 더 달라져야 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 화답송에 나온 “주님 주님의 길을 제게 알려주소서.” 라고 노래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저 제자리에 머물고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남들은 달라져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3주일이면서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해마다 1월의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주일’ 로 정하고 있는데요. 우리도 예전 전쟁이 나고 힘들었을 때 많은 원조를 받았기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도 다시 힘들게 되었지만 우리보다 못한 이들의 눈빛은 우리를 부릅니다. 그런 눈빛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달라져 있는 사람입니다. 예전의 나와 달라져 있는 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물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밥줄이라 할 수 있는 그물 이상의 삶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언지 당장은 모르지만 그런 삶이 있기를 바라면서 준비한 기다림이었기에 그들은 따를 수 있었고, 요나의 말에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태원 본당 교우 여러분.
무지한 사람보다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좋지 못한 대접을 받은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들이 많이 공부한 것을 제대로 삶에 활용하지 못하고 그저 그들이 만든 틀에 갇혀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배움의 내용은 이미 과거의 것입니다. 그것을 현실에 맞춰갈 때 새로운 삶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우린 계속 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달라지는 삶을 꿈꾸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다가온 2009년 새해입니다. 진정 달라지고 싶다는 갈증의 삶을 가질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몸부림을 못 본체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