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미사. 사무엘 상 3,3ㄴ-10.19;고린토1서6,13ㄷ-15ㄱ.17-20;요한 1,35-42
찬미 예수님. 교우 여러분 일주일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돌아가신 인도의 신부님인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책 제목 중에 ‘종교박람회’ 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처럼 세상의 모습은 종교 박람회를 연상케 합니다. 강남의 종합무역센터인 코엑스처럼 같은 하느님을 믿어도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 성공회, 유대교, 우리 옆집에 사는 이슬람교까지 아주 다양한 모습을 연출해주고 있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인데 우린 왜 갈라져야 할까요? 오늘은 연중 2주일이면서 일치주간입니다. 매년 1월 18일부터 25일인 성 바오로 사도 개종축일까지 이 주간에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해 간구하는 주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박람회를 연상케 하는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터부시 하지 않고 이렇게 부릅니다. ‘갈라진 형제’ 라고요. 갈라졌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만나려면 어떤 자세에서 출발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부르심을 받고 잘 유지시켜 나갈 때 이루어집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렇게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1독서에서 엘리의 제자였지만 아직 하느님이 누구신지조차 몰랐던 사무엘에게 부르심이 찾아옵니다.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것은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가 자기 집안과 아들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기에 그로 인한 벌로 하느님의 영이 엘리에게서 떠나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 모든 것을 스승인 엘리에게 이야기하자 엘리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 어련하시랴?” 하고요. 비록 주님의 영이 자신을 떠나가고 있었지만 자신의 행실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당신이 부르신 표현 방법은 이것이었습니다. “와서 보아라.” 올 줄 알고, 볼 줄 아는 사람은 당신의 삶을 보고도 기뻐할 줄 압니다. 그러나 와서 보아도 그것이 무언지 모르는 삶은 누구도 어떻게 해 줄 수 없습니다. 이미 그의 눈은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상태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전의 신앙의 선조들보다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지적인 수준도 예전의 그들보다 높고, 한 마디를 해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의 선조들보다 훨씬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느냐?’ 고 누가 물어본다면 확답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대신 그 이유를 공관복음에 나온 부자청년의 예로 들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제자가 되겠다고 말한 똑똑한 부자 청년이 제자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그때서야 나를 따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 자리를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현실과 신앙이 연결되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갭(gap)이 존재합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당신으로부터 돌아설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을 다들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을 어떻게 이겨나갈까 살펴봐야 하는데요. 2독서에서 그런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라고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성적(性的)인 것에서 몸을 잘 간수하라는 이야기에서 그치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그분이 나를 언제라도 쓰실 수 있도록 항상 준비를 잘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몸 관리를 하듯이 그렇게 나 자신을 기다림과 준비 속에서 나를 만들어 갈 때 갑자기 다가올 수 있는 그분의 목소리를 더 크게 확실히 들을 수 있고 좀 더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태원 본당 교우 여러분!
개신교를 태동케 했던 루터가 처음부터 종교를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반박문을 교회문에 붙여 놓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자기를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인 상황을 보면서 결국 우리가 이 시간을 살고 있는 참된 이유는 그분의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분의 음성에 따라 잘 분별하며 살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저 개인, 단체가 바라는 음성을 떠나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참된 부르심에 따른 일치의 삶으로 연결됩니다.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왜 머물러만 계십니까? 당신은 그렇게 우리를 부르시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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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2주일 어린이 미사.
할머니: 어이구 열 받아.. 아이구 열 받아..
신부 : 할머니 ..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 계세요?
할머니 : 제 둘째 며느리가.... 이것이 글쎄... 이 시애미 축일 축하한다고
프랜차이즈 점에 데려갔어요...걱정하지말고 많이 드시라고 하면서요
..거 있잖아요? 뱁새, 아웃가방, 칼로 고기 써는데...말이예요.....
신부 : 착하고 좋은 며느리 두셨네요? 그래.. 많이 드시고 오셨어요?
할머니 : 글쎄.. 그것이 나... 부담 돼 죽으라고.. 나 많이 먹고 죽으라고,
그런데를 데리고 가잖아요? 비싼 것 알고 놀래 죽으라고...응응....
봉달 : 신부님~~ 성당 옆에 이상한 궁궐이 있어요.....
할머니 : 궁궐? 그래..내가 예전 소시적에 한 미모했지.. 그걸 알고 궁궐을
지었구만... 나 이제 거기로 이사갈꺼야.. 내 가방 어딨나????
신부 : 아~~ 그것은 우리 동네에 있는 이슬람 사원이에요..그곳은 비록 예수
님을 믿지 않지만 하느님을 믿고 있지요..
봉달 : 전요.. 신부님..예전부터 이슬람 문화가 좋았어요. 케밥 먹을 때 만요.
신부 : 안 그래도 오늘은 연중 2주일이면서 일치주간이에요. 같은 하느님을 믿더라도
참으로 다양한 교회가 있지요?
할머니 : 맞아요 신부님.. 시장에 가다보면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 성공회,
유대교, 이슬람교 등등 너무 많아요.. 하느님도 헷갈리실 것 같은 데..
하느님은 한 분인데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신부 : 글쎄요.. 참 가슴 아픈 일인데요..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형제
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진 형제’라고 부르고 있어요. 비록
그렇게 갈라진 형제들은 나중에 만날 것이라 믿고 기도하고 있지요.
봉달 :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신부 :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오늘 1독서에 보면 사무엘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요? 복음에도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고요..우리도 똑같이 부르심 을 받은
사람인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않는 자세가 중요해요..
사실 개신교에 시초가 된 루터도 수도회 수사님이었거든요?
그저 교회 문에다가 자신의 주장을 편 것 뿐인데..
자신이 교회를 나올 수 밖에 없는 처지까지 이르게 된 거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사무엘처럼 기도했어야 하는데요..
봉달 : 맞아요 신부님..“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처럼 말이죠?
신부 : 다 자기 주장을 펴고 싶은 세상이에요.. 하지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평화를 이루면서 하셨을까? 고민할 때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텐데요..
봉달 : 여러분도 주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혼란을 이겨나갈 수 있을꺼예요..
내일부터 있을 피정 잘 다녀오시고요.. 바이바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