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2010. 8. 22. 오후 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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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올리베따노 수녀원에서 강론

어제 종신서원 받으신 수녀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수녀원도 좋은 일만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의 삶은 참 기적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전혀 만난 적 없는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한 카리스마를 형성해 간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인데요. 저도 신학생이 되고나서 좋았던 점은 좁은 제 식견을 벗어나 서울의 동서남북 사는 이들이 모여 다르지만 하나로 일궈가는 모습이 참 흥미로웠는데요. 그 중에서 같이 공부했던 한 친구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그 친구는 수사신부님입니다. 우연찮케 그 수도원의 행사가 있어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미사가 끝난 후 어떤 자매님이 오셔서 자기가 지금 힘든 처지에 있다면서 안수를 해달라고 그 수사신부님께 간곡히 부탁을 해왔습니다. 저야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이 친구의 안색이 자연스럽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수도원에만 있다보니 신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강복해줄 때 필요한 기도문이 생각 안 나는 모양이었는데요. 그렇다고 제가 끼어들며 ‘내가 할게’ 라고 할 수도 없잖습니까? 멈칫거리길 2-3초 지나자 ‘아 그렇지!’ 하면서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그 자매님의 머릴 감싸쥐고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여기도 수사신부님이 계시지만 희화화 하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직무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르지만 교회 안에서 하나로 관통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서로 다르지만 하나로 가야하는 관계를 본당에서 신부님과 수녀님 사이에서 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이가 좋지 않는 모습도 봅니다. 솔직히 본당에서만 놓고 보면 수녀님들이 약자(弱者)지요. 뒤에서 수녀님들이 일 다해 놓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글로리아는 신부님들이 차지하잖습니까? 오늘 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모습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무덤에 갇혀있는 듯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전 영성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있잖아? 신부나 수녀중에 오래되면 괴물이 되는 사람이 있어...” 라고요. 과연 다가오는 것들을 내 안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불교에 원융무애(圓融無楝)란 말이 있습니다. 즉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함정을 만나십니다. “그들 가운데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하지만 걸려 넘어지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스테파노 성인도 머리는 돌을 맞고 있지만 눈은 하늘이 열린 것을 보잖습니까? 싸움이 성사되려면 적수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를 적수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싸움 자체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서초구에 있기 때문에 법원이 참 많고 법조인들도 많이 삽니다. 그래서 그런 지 교인들도 문제가 생기면 법대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데요. 그런 하늘의 법은 어떤 걸까요? 노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코가 넓어서 성기어도 빠뜨리는 게 없다.’ 고요. 즉 사람이 만든 법망은 너무 촘촘해 보여 물샐 틈 없어 보이지만 언제나 빠져나갈 사람은 다 빠져나가지요. 하지만 하늘의 법은 자칫 엉성해 보여도 다 걸리게 마련이라는건데요.

오늘 이렇게 물어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법이 처음부터 많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그만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도 혼란에 빠지는데요. 오늘은 저보다 잘 아시는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스콜라 학파 이전 분이기 때문에 조금은 비체계적이요, 비조직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의 직관과 카리스마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는 신학의 전체적 요점을 꿰뚫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요즘엔 부분 전문가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또 그런 전문가들이 목소리를 드높입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우리만큼은 부분이 아닌 예수님의 모습처럼 하나로 관통하면서 바라보고,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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