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3 주일미사.
예전 신학생이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저보다 한 학년 위인 학사님 한 분이 얼굴이 수심이 가득한 채 며칠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선배인지라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모르다가 나중에는 아예 학교를 나가버렸는데요. 며칠 후, 원장 신부님께서 자초지종을 저희에게 말해주십니다. 이유인즉슨,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집안이 기울었답니다. 당연히 고민하던 그 학사님은 집에 자식이라고는 자신 혼자밖에 없었기에, 경제적인 난국을 해결하려고 성소를 접어야겠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학교를 나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하신다면 같은 결론을 내리셨겠습니까?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진정 부모님이 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을까?’ 하고요. 당장에는 자식이 돌아와 뭐라도 하니까 도움이 될런 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과 가족을 위한 결정이 바로 그것밖에 없었을까?’ 하고 자문한다면 대답이 쉽지 않는데요. 이 상황을 보며 우린 그동안 예수님을 어떻게 따르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오늘 복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말을 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그에 의견에 예수님은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조건을 내겁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주십시오” 여기에 당신은 아주 차갑게 들리는 어조로 답합니다.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여러분들은 이 광경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따르겠다면서 여전히 나의 발목을 잡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주십시오” 라는 말처럼, 하느님과 맞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들 말입니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말이지요.
여기서 우린 살펴야 합니다.. ‘진정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요. 그러면서 물어봐야 합니다. ‘지금 내가 뭔가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일’ 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선순위를 따질 때 주님이 그 일에 밀립니다. 하느님과 자신이 생각하는 중요한 것 사이에서 하느님은 2순위 이하로 밀리고 중요한 것이라 여긴 것이 우선순위에 오릅니다.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진정 참된 신앙생활이라면, 내가 마주하는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세가 중요한데요. 그래야 참 자유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뭔가에 사로잡혀 있으면 신앙생활이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 되는데요.
오늘은 교황주일입니다. 우리가 교황님이 되어 본 적도 없고, 그런 선출이 되었더라도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라고 말해준 사람도 없었기에 쉽게 가늠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자리가 주는 고독, 책임감, 중압감 등을 막연하게 떠올려도 기존에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제일 먼저 드는 감정이겠지요. 하지만 내려놓았기에, 포기했기에, 더 큰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는 헤아려 보셨는지요?
이제 우리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뭔가를 한다지만 교회에서 행한다는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무장된 기도와 말씀이 없는 봉사는,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자기만족은 결국 교만으로 이어지고요. 사랑없는 건조한 삶이 되고 맙니다. 오늘 2독서의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예를 들자면 한 본당의 신부로 살면서 성공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이 있습니다. 신자들의 원하는 데로 예산편성하고요. 원하는 데로 같이 모여 행사도 자주 하고요. 신자들이 원치 않는 것들은 하지 않고요. 처음엔 반응이 좋을 수 있지만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요? 결국 기본이 빠진 기도와 말씀 없는 봉사가 가져다 줄 열매란 무얼까요? 우린 이미 알지요. 한 본당의 파산, 그걸 좋다고 따라 하다가 같이 망하는 교회와 세상을요. 기본을 잘 잡아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