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0주간 수요일. 열왕기 상 18,20-39;마태오 5,17-19
예전에 사제관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을 밝히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다른 신부님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제관에 전화를 걸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익명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습니다. 답을 해 드려도 열성을 다하려는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답만을 원할 뿐, 진정한 공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전화가 왔습니다. 20대 후반의 자매라 밝힌 그분의 요지는 이겁니다. ‘자신의 엄마가 믿는 모습을 보니 하느님이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그럼 다른 종교의 신은 무어냐? 그럼 그 사람들의 신앙관은 헛된 것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순간 저는 이런 느낌이 떠올랐습니다. 그 자매의 현재 모습은 어느 것 하나 발을 담그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는, 푸념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마치 방관자의 모습에서 여러 종교에 관해 늘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엘리야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 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백성들.. 그러나 이미 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체험들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흔들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지만, 또 뭔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다른 것에 매달리려 합니다.
옛 서적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가지고 도(道)를 구해도 잘못이지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서 도(道)를 구하는 것도 잘못이다.’ 고요. 며칠 전 복음에 그랬잖습니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라고요.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런 말씀도 있지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고요. 피조물이 피조물을 외면하고, 어디에서 조물주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피조물에만 눈길이 갇혀 버린다면, 또한 어디에서 조물주를 뵙겠습니까? 우린 그냥 봐선 모릅니다. 퍼온 이 물이 수돗물인지, 풀장물인지, 바닷물인지를요. 들어가서 맛을 봐야 진정 알 수 있는데요. 여기 있는 우리들은 방관자가 아닌 체험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럼 주님에 대해 어떤 맛을 보셨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