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6주일

2026. 5. 9. 오전 10:5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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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6주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여러운 실정에서 여러분의 판단 기준은 무엇입니까?이런 문제는 신자건 아니건 간에, 살아야 하는 이들이 마주 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데요. 여기에 시편 119105절을 소개해봅니다.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어두운 곳을 가야할 때, 라이트를 켜서 어디를 비춥니까? 하늘이나 얼굴에 비추진 않지요. 발밑을 비춥니다. 예전부터 그랬지요. 발을 잘못 내딛다가 바닥을 구르니까요. 앞서 시편은 이처럼 체험에서 나온 자기 고백인데요.

 오늘 말씀은 단지 계명을 지키라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렇게만 여기면 억압으로 밖에 보이지 않지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보호자를 보내신다는 말씀에서 무엇이 떠올려지시나요? 이미 세상에서 말하는 것을 우린 압니다. 세상의 메시지가 뭔가요? 어차피 인생은 혼자다. 가족, 친구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주진 못한다.’ 는 세상의 목소리를요. 맞습니다. 어느 한편에서는 그런 구석이 있습니다. 온전히, 쏙 마음에 채워주는 완전 무결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단언컨대 그런 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홀로 방안에 박힌 채로 자기를 가둘 이유도 없지요. 상처 안 받겠다고 아무 것도 안할 수 없는 것처럼요. 다행히도 안 보이는 그분의 개입과 활동인 성령이 계십니다. 외국어로 프네우마티코(Puneumatico)는 이탈리아에서 쓰이는 말이지만 기원은 그리스어입니다. ‘바람을 채우다는 뜻이죠. 자동차가 가려면 기름만 있어선 안되지요. 타이어에 공기가 주입되어 땡땡해져야 편안한 승차감으로 길을 주행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바람은 시들해지고, 기운빠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줄 수 있습니다. 이런 걸 아는 이라면 가톨릭 성가 406번 성가 '세상에 외치고 싶어' 가사에서 왜 내가 늘 기쁜가? 진정 그들은 놀라리라. 내겐 두려움 없음을이란 가사가 쓰인 이유도 성령은 우릴 지켜주시고, 보호자, 후견인처럼 도움을 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망상, 답정너의 세상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이끌어주십니다.

 여러분의 판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우린 실수투성이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만 믿기에는 위험 요소가 많지요. 그렇다면 내 판단이 제대로 되기 위하여 내 맘에서 울려주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요. 모른다고 그것이 바로 불안함으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안내와 인도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지금의 답답함이 오히려 기회의 문으로 다가간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러니 내 생각에 가로막히진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나를 통해 이뤄주시니, 나를 열어드리고 그분을 초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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