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간 목요일
성경을 읽다보면 분명 한글로 쓰여졌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되지 않곤 합니다. 알 듯 말듯한 말씀은 사실, 요한이 쓴 당대에 퍼진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여러 시도를 한 시대 안에서 녹아있기 때문에 그런데요. 그런 역사를 모르면 와닿지 않을 수 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강론시간이 강의시간은 아니기 때문에 짧게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감각의 세계를 넘어선 신. 하느님은 신비적인 영역에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는 그리스도교나 다른 비그리스도교에도 널리 퍼진 사상입니다. 이른바 신을 만나는 ‘접신’ 은 구약의 이방인의 신을 모시는 점쟁이에게도 나오는 장면입니다. 마치 민수기 22장의 발라암 이야기처럼요.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신비적인 차원은 7가지의 특성을 가지는데요. ① 원초적인 것으로 누구는 진정 하느님을 만납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으면서요. ② 여기에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길을 가고프다면 ③ 능동적인 비움의 단계를 거칩니다. 이것이 실천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자기 이득이 아닌, 타인에 대한 시선이 담겨 있으니까요. ④ 실천은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야 합니다. ⑤ 하지만 상대의 한계를 보면서 거기서 멈추지 않고 초탈의 경지를 만납니다. 더 나아가는 것이죠. ⑥ 이런 초월을 표현하려면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는데요. 예를 들어,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하나됨에서 안식을 누린다’ 라는 표현을 썼고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혼의 노래’ 에서 부정의 방식으로 걸러내면서 긍정의 방식을 찾게 됩니다. ⑦ 그러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혼인’을 가지고 표상화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받아들이고, 신부가 신랑에게 하나 되려는 자신을 주는 증여의 차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지만 한편 아버지가 누군지, 아들이 뭘 하는 지, 여기에 성령은 어떤 은사를 베푸는 지에 대해 알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주고받는 관계는 몇 개의 체험보다 더 중요한데요. 그분을 참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오신 분”을 내가 어찌 받아들일 것인가? 는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각자에게나, 모두에게 말이죠. 그러니 주님을 더 알도록 힘쓸 때 오해하지 않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