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간 목요일

2026. 4. 16. 오후 2: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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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주간 목요일

 성경을 읽다보면 분명 한글로 쓰여졌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되지 않곤 합니다. 알 듯 말듯한 말씀은 사실, 요한이 쓴 당대에 퍼진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여러 시도를 한 시대 안에서 녹아있기 때문에 그런데요. 그런 역사를 모르면 와닿지 않을 수 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강론시간이 강의시간은 아니기 때문에 짧게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감각의 세계를 넘어선 신. 하느님은 신비적인 영역에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는 그리스도교나 다른 비그리스도교에도 널리 퍼진 사상입니다. 이른바 신을 만나는 접신은 구약의 이방인의 신을 모시는 점쟁이에게도 나오는 장면입니다. 마치 민수기 22장의 발라암 이야기처럼요.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신비적인 차원은 7가지의 특성을 가지는데요. 원초적인 것으로 누구는 진정 하느님을 만납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으면서요. 여기에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길을 가고프다면 능동적인 비움의 단계를 거칩니다. 이것이 실천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자기 이득이 아닌, 타인에 대한 시선이 담겨 있으니까요. 실천은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야 합니다. 하지만 상대의 한계를 보면서 거기서 멈추지 않고 초탈의 경지를 만납니다. 더 나아가는 것이죠. 이런 초월을 표현하려면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는데요. 예를 들어,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하나됨에서 안식을 누린다라는 표현을 썼고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혼의 노래에서 부정의 방식으로 걸러내면서 긍정의 방식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혼인을 가지고 표상화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받아들이고, 신부가 신랑에게 하나 되려는 자신을 주는 증여의 차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지만 한편 아버지가 누군지, 아들이 뭘 하는 지, 여기에 성령은 어떤 은사를 베푸는 지에 대해 알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주고받는 관계는 몇 개의 체험보다 더 중요한데요. 그분을 참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오신 분을 내가 어찌 받아들일 것인가? 는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각자에게나, 모두에게 말이죠. 그러니 주님을 더 알도록 힘쓸 때 오해하지 않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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