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지금 겪는 전쟁과 그로인해 피해받는 여러 나라의 사태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도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은 자기네가 전쟁의 피해를 입은 나라임을 만방에 알린 국가입니다. 그래서 한편 많은 동정을 받았었지요.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서 그것이 ‘모델링’ 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모델링은 학습된 폭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이나 학교에서 폭력을 당한 이가, 나중에 해결수단으로 폭력을 가하는 사태지요. 이렇게 되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됩니다. 여기서 그는 더 이상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 선제적인 공격성을 띠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주일을 맞이하는 오늘과 나란히 견주게 되는데요. 과연 우린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까요?
지난 주 부활 성야 때, 성당의 불이 다 꺼진 곳에서 부활초 하나만 켜들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우리의 빛’ 여기에 여러분은 이렇게 답했지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나의 빛으로 시작된 것을 서로의 초에 불을 붙여주고성당이 점차 밝아지는 것을 전례 안에서 체험하였습니다. 이게 단순한 의식일까요? 아니지요. 점차 밝아짐을 봤으니까요. 그리고 내가 켰던 촛불을 남에게 나눠준다고 내 양초의 불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봤습니다. 이로써 알게 됐지요. ‘나눠준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구나..’ 불이 가진 성질이기도 하겠지만 나눔은 모두를 밝힌다는 것을 알게 해줬는데요. 이것이 주님의 자비로움이지요.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서 모두를 살리는 것을요.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헌데 제자들은 모두 문을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자기네가 동조범으로 연루될까 그럴 수 있고요. 그런 분위기에서 나다니지 못하는 바짝 움츠러든 현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부활한 주님을 만난 사람도 있었지만, 토마는 “나는 그분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소” 라 말합니다. 여기에 주님은 나타나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주님의 상태입니다. 부활하셨지만 상흔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상처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구멍이 뚫린 채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처는 나아야 한다. 없어져야 한다. 새 살이 돋아나야 한다’고요. 하지만 실제 상처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덮혀있을 뿐이죠. 묻혀졌지만 아예 없던 일처럼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트라우마’ 또는 ‘트리거’ 라는 말이 있지요. 과거에 경험했던 공포와 같은 순간이 발생했을 때, 당시의 감정을 다시금 느끼면서 심리적 불안을 겪거나 폭주하는 증상이지요. 여기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한 번 보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보이며 만져보라 하십니다. 그래서 건전한 정신상태를 가진 이들이 잘하는 일 중에 하나가 셀프 디스입니다. 자기의 치부를 유머화하여 드러내지요. 예를 들자면 ‘제가 예전에 쓴 강론을 지금 읽어보면 부끄러워 이불킥 할 정도의 것이 많지요..’ 이런 겁니다. 여기에 예전 번역 성경에는 토마의 행동에 대해 소제목에서 ‘토마의 불신앙’이라고 써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하진 않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약한 신앙을 알기에, 감싸주는 이해심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 모두 약한 이들이지요.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았었고요. 내가 의도한 바가 잘못 전해지기도 하였었지요. 하지만 그런 것에 연연해하고 괘씸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서로에게 통 큰 사랑으로 다가가주는 것이 필요함을 말씀하시는데요. 2차 세계대전 이후, 2016년까지 세계 속에서 벌어진 전쟁횟수는 250회가 넘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10년 전 기록이지요. 주님을 닮는 삶을 지향한다면 나의 상처와 아픔은 없어지진 않을 지언정, 되갚아 주는 만행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해를 저지른 그 사람보다 나아지는 것이 진정한 복수요, 해결책이 아니겠습니까? 어지럽고 힘든 세상일수록 주님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