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같은 남자로서 예수님의 양부(養父)인 요셉은 좀 짠해보입니다. 결혼을 하려하니 이미 마리아는 임신한 상태고요. 아들도 내 아이가 아닙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막장 드라마’ 로 보일 이 모양새가 신앙의 카테고리에 들어오면 상황은 바뀝니다. ‘자기를 내려놓으며 받아들이는 참 모습’ 이라고요.
동명이인인 창세기의 요셉에게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는 모든 일을 잘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창세 39,2)” 여기서 일이 잘 된다는 말은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닌, 하느님과 관계할 때 순탄한 삶이 되는 사람을 뜻합니다. 요셉은 형제에게 따돌림 당하고 남의 나라로 팔려가는 팔자 사나운 삶이었지요. 창세기의 요셉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므로..” 라는 앞의 말씀에 전제가 붙습니다. 여기에 대축일을 맞은 요셉도 그러하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꿈에 천사가 보였다고, 다 시킨대로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작정하였어도 그는 한 쪽은 열려있었습니다. 열어놓고 있었기에 내가 다 모를 가능성과 여지가 그를 살릴 수 있었고요. 예수님과 성모님을 살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가끔 신자들과 면담을 하다보면 느낍니다. 이들은 나름의 사연을 들고 옵니다. 하지만 이미 마음 먹은 결정과 답안지도 함께 가져오면서 제시합니다. ‘신부님. 제가 이러이러할 것이니.. 그냥 해주시는 겁니다’ 라는 게 들어있지요.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태도에서 요셉의 들음의 경지가 어디 있겠으며, 하느님의 신비를 기다리고 열어놓는 자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반대를 받을 때, 그 사람의 참 모습이 나온다고 하지요. 그 반대 받음과 역경이 결국 어디로 이끄는 지가 그 사람의 실제의 모습인데요. 아무리 번듯한 옷차림에 예의 바르고, 입에 발린 말을 해도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여차없이 달려드는 세상에서 ‘나는 그렇지 않다. 다르다’ 고 감히 주장할 수 있을까요?
요셉 성인의 신심을 읽어봐야 하겠습니다. 뜻모를 하느님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갔는 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