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간 수요일
음악을 배우다보면 ‘스케일’ 이란 게 있습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는 기본 장음계 스케일입니다. 여기에 조표가 어디에 붙냐에 따라 근음이 달라지지요. 그러다 이런 문구를 보게 됩니다. ‘스케일을 안다고 해서 멜로디를 작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음을 들어봤고 어떤 것인지 알지만 정작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았던 것은 나름 작곡해보겠다고 앉아 있었지만 정작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경험하고 나서였는데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는 것 - 정확히 배운 것과 – 실제는 다르다’ 는 사실입니다. 제대로 알았어야 했던 것이죠. 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을까요?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규정을 어기는 것처럼 봤기 때문입니다. 허나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라고 말씀하신 입장에서는 스케일 속에서 의미없는 음의 나열이 아니라 말씀하고픈 중심 음을 건드려주면서 강조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신비의 영역과 현실을 파악하는 눈이 공존되어야 하는데요. 강조를 하다보면 여타의 것과 새롭게 보입니다. 그게 이질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모르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사업은 제대로 더 사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듯 ‘그 정도 수준’에서 맴돌기 바랍니다. 머물고만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갇힌 이들에게 나와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신 것처럼 숨겨져 있고, 주목하지 않은 이들을 이끌어주시지만 마치 의미없는 음의 나열만 알던 이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실제는 무엇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