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4주일

2025. 12. 22. 오전 8: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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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4주일

 벌써 초가 다 켜졌습니다. 기다림이 충만하다는 뜻이겠고요. 이제 그분이 오실 때가 가까이 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이런 목소리가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 그걸 보려고 왔지요. 여러분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위기가 닥칠 때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 지를 봐야만 내가 누군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1독서 이사야서 7장의 상황을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모르면 이해가 안되기에 잠깐 배경설명을 드리자면, 기원전 930년경. 솔로몬 왕이 죽고서 이스라엘은 갈릴레아 호수 근처의 북이스라엘과 사해 근처 남유다로 갈립니다. 솔로몬이 지혜의 임금이요, 역사상 가장 번영한 때라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아버지 다윗왕이 터전을 닦아놓았기에 가능했고요. 번영과 화려함에 취한 아들 솔로몬은, 다른 국가와의 결혼정책으로 이방인의 신을 섬기며 쇠락을 맞이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다른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지만, 남유다는 비교적 정치적 안정을 누리며 다윗의 후손으로만 왕위를 이어갑니다. 그러면서 열심한 임금도 많이 나왔지요. 당시 배경은 시리야와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막 초강국으로 팽창하던 아시리아 왕국을 막고자 했습니다. 여기에 오늘 주인공인 남유다왕국 아하즈에게도 동맹을 맺자고 압력을 가합니다만 그 압력을 거부했기에, 분개한 두 동맹국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옵니다. 이제 아하즈는 선택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하느님을 믿던가아니면 신흥 강대국인 아시리아와 손을 잡던가입니다. 여러분이 임금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에 이사야의 입을 빌어 하느님은 제안합니다. 저 저승 깊은 곳이든, 저 위 높은 곳이든 아무 것이나 청하여라 이 말은 하느님이 아하즈에게 백지수표를 주신 것과 같습니다. 해석은 이렇습니다. 네가 두려워하는 저 나라는 작은 문제일 뿐이다. 나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까지 다스리기에 날 믿어라 는 초대였지만, 그 말이 귀에 들릴 리가 없지요. 아하즈는 이미 아시리아와 손잡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인이기에 완고히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유다 왕인 아하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주 하느님께 표징을 청하여라 는 요구에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 말만 놓고보면 존경할 만하고 신앙 깊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건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그는 참으로 교활했습니다. 그 말은 신명기 6,16 “너희는 주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된다 라는 율법에서 따왔습니다. 말만 놓고보면 흠잡을 데 없어보이지만, 그 속내는 신학적인 올바름 뒤에 숨어, 믿음의 모험을 회피하는 비겁함이었습니다. 번역상 시험하다로 쓰고 있지만 원문에는 청하여라고 기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어떤 일이라도 하느님께 청하여라 인데, 그는 살짝 비틀어 주님의 요청을 경건한 척 외면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초대하시는데 아하즈는 그것이 부담스러워 경건한 척, 기회를 거절하지요. 사실 이런 건 본당에서 많이 벌어집니다. 봉사할 수 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의 겸손을 가장하며 거절하는 경우를요. 아하즈는 이미 아시리와와 손잡는 인간적인 답으로 정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의 개입이란 것이 귀찮고 불편했던 것이죠. 이미 답을 낸 답정너와 무슨 대화가 되겠습니까? 그걸 아시기에 주님은 이사야를 시켜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구세주 탄생을 예언합니다. 이게 아하즈 입장에서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의 양면성을 지닙니다. 좋은 소식은 아하즈가 두려워하던 동맹을 맺은 두 나라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것. 나쁜 소식은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차원이 심판의 경고였습니다. 사실 신앙은 믿는 사람에게는 희망이요, 안 믿는 사람에겐 징벌입니다. 예상대로 아하즈는 아시리아에게 붙지만 아시리아는 그런 아하즈를 결국 잔인하게 거절해버립니다.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위기가 다가올 때 어떤 방식으로 이겨나가십니까? 아하즈처럼 당장 보이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합니까? 아니면 구세주를 믿으며 내 인생을 걸어보십니까? 우린 내 이성을 넘어서며 다가오는 것을 못미더워하고 부담스럽게 바라보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늘 나의 차원을 넘어서서 초대하곤 하셨습니다. 그저 뻔하게 일처리를 안하시지요. 그렇다면 당장의 것을 쫓는 현실의 나를 꾸짖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 인간적인 방법은 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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