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주간 월요일
오늘 독서는 민수기 24장입니다. 헌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22장부터 보셔야 합니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이방인 점쟁이입니다. 이른바 무당, 신의 음성을 전하는 복술자, 신접하는 이지요. 그에게 치모르의 아들 발락. 모압 땅 임금이 발라암에게 의뢰를 해옵니다. 자기네에게 다가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그 백성에게 저주해달라’ 는 겁니다. 당시 모압에서 발라암이 살던 프토르까지 650km가 넘는 거리라는데 여기까지 찾아간 것을 보면 아마 유명세가 있던 모양입니다. 의뢰를 해왔으니 발라암은 요청을 따릅니다. 하지만 신탁을 할 때마다 하느님을 4번이나 만나면서 저주가 아닌, 이스라엘의 축복을 빌어줍니다. 여기에 발락은 화가 날 수 밖에 없지요. 여기에 발라암은 항변합니다. “집에 가득 찰 만한 금과 은을 준다해도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만 말해야 합니다.(민수 24,19)” 그가 하느님을 믿은 이는 아니고 그저 여러 신을 만나는 신접을 하다보니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자기에게 들어오는 목소리를 전해야 하는 삶을 사는 이이니까요. 그러면서 17절에 “야곱에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서 왕홀이 솟아난다” 는 예수님 탄생까지 예고를 합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발라암이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타던 나귀는 하느님의 사자를 볼 수 있었기에 주인인 발라암을 막아서지만 정작 그는 보지 못한다거나, 신탁을 받았음에도 뭔가 유리한 징조를 찾으려 애쓰는 장면도 나옵니다. 간교한 욕망이 숨어있지요. 그러다 민수기 31장에 칼에 맞아 죽음을 당하는데요.
복음은 예수님이 수석사제들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여기에 대답하기 곤란해지니까 “모르겠소” 라고 답해버립니다. 여기서 무엇이 보입니까? 뭔가 알고 있지만 꼼수를 보이거나 대답을 안 해버리는 그들을 보며 묻게 되지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 주님의 일을 어떻게 실천해내느냐?' 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요.
1년 전 우린 계엄사태를 맞이하면서 많은 국민들이 국회로 뛰어갔습니다. 이걸 뉴스보도에서는 ‘국민의 숭리’ 라고 보도하겠지만 만약 성경저자의 관점에서 이 보도를 쓴다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국회로 뛰어가게 만드셨다’ 할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러면서 사람이 아닌, 무당의 말을 듣는 정권이라면 ‘신을 통해 신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의 계획은 그렇게 움직인다고 표현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것을 현실로 잘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그리스도교인뿐 아니라 이방인마저 움직이는 하느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받은 세례의 삶을 숭고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