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야 58,1-9ㄴ;마태오 9,14-15
가끔 면담을 하다보면 별별 분을 다 만나는데요. 예전에 어떤 학생을 만났습니다. “제가요. 공부를 좀 하거든요? 그런데 애들이 저를 안 알아줘요. 참 이상해요..” 라고요. 그러자 제가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공부는 왜 하려는 거예요?” 순간 어이없다는 듯 저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답하더군요. “당연히 공부를 잘하면 좋은 데도 가고 저를 알아주니까요...” 여러분은 거의 대부분 학교를 졸업했거나 또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럼 여러분께 여쭙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공부를 왜 해오셨습니까?
오늘 독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라고요. 과연 그 사람은 무슨 의도로 그렇게 단식하였을까요? 과연 단식의 의미를 알고는 있었던 것일까요? 논어의 제일 첫 장, 학이(學而)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음은 어찌 군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길 바라기에, 오늘도 열심히 블로그를 올리고 동영상을 올리면서 조회수가 올라가는 것을 즐기고 댓글이 많이 달리길 바라는데요. 그렇다면 여러분도 과연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모든 것을 시작하셨습니까? 독서에서 단식을 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의 마음의 근원에는, 그 고행마저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기를 맛본 연예인들의 말로(末路)가 어떤 지 보셨습니까? 전 한때 방송하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예전의 그 영광을 되찾으려, 어떻게든 게스트라도 출연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을요. 진정 실력이 있다면 방송국이 알아서 찾아갔을텐데 말이지요.
우린 사순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참된 사순은 무엇이겠습니까?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는 말씀처럼 자기를 내려놓고 남을 바라보는 자세, 알아주지 않아도 그분의 뜻을 살아가는 자세, 그러면서 기쁨을 잃지 않는 자세, 그거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나 자신을 너무 살리느라 주력한 것은 아닌 지 바라볼 때, 참된 죽음으로 참된 삶이 올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