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4주일미사. 예레미아 1,4-19;고린토1서 12,31-13,13;루카 4,21-30
찬미 예수님! 일주일동안 교우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많은 신자분들은 강론 잘하는 신부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강론시간이 재미없다고 주보 보시는 몇몇 분들.. 어째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강론보다는 주보 보시면서 잔재미 좀 챙기셨습니까? 저도 예전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강론 잘하는 사제가 사제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고 말입니다. 한때 그런 편향성에 사로잡혔던 있었던 제 예전의 일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몇 년전 본당 주임신부님께서 휴가를 주셨는데요. 운 좋게도 주일을 끼고 다녀오게끔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남도지방을 다니다가 주일이 되어 성당에 들어가 여러분처럼 자리에 앉아 미사를 참례하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복음이 끝나고 강론이 시작되었을 무렵, 전 앉아있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계신 연세 지긋한 신부님의 강론을 듣기가 너무 버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간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곳 신자들에게 그런 모습은 너무 당연하게 보였는지 별일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최신의 신학을 배웠다는 교만함이 있었던 모양인지, 연세 지긋하신 신부님처럼 원숙미는 없지만, 그래도 패기와 젊음이 있다고 믿었는지, 그 신부님이 하시는 강론 스타일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요. 하지만 그 일이 있고나서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론은 너무 잘하면 안 된다’ 는 것을 말입니다. 순간 이 발언에 대해 무슨 말인가 갸우뚱 하실 텐데요.
2독서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고요. 좋은 말씀이면 무얼합니까? 삶이 베어있어야 하지요. 사랑이 깃든 진솔함이 숨어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강론을 너무 잘 준비하다보면 문제점이 생깁니다. 준비하면서 교우 분들의 반응을 슬며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음은 묻히게 됩니다. 강론은 독서와 복음 말씀을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지, 인간적인 말솜씨로 주님의 말씀을 묻히게 만든다면 이는 더 큰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꼴인데요.
오늘 복음 말씀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아마 그 말씀에 사람들이 놀랄 수 있었던 배경은 예수님의 화려한 말솜씨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 안에서 진리와 진솔함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신부님들에게 강론을 잘하길 원하지만 여러 신부님들을 만나 뵈오면서 느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성령의 은사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여러 개이듯, 신부님들을 통해 강론 이외의 여러 다양한 은사가 뿜어 나오고 있음을 말입니다. 교회를 짓는 은사, 말씀을 연구하는 은사, 영을 식별하는 은사, 남을 가르치는 은사 등등 말입니다. 1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고요. 세상이 윤택하게 돌아가기 위해 하느님은 세상에 다양성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그런 은사를 주셨는데요. 과연 당신은 어떤 것을 내게 주셨을까요?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는데요.
사랑하는 방배동 (청년과) 교우 여러분...
중세 신비신학에 의하면 영적 삶의 목적은 바로, 하느님을 즐기는 것이라 합니다. 하느님을 즐기려면 그 분에게 나오는 은사가 여러 가지임을 인정하고 내가 바라는 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2독서 말씀에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처럼 그분이 나를 통해 무엇을 바라시는 지, 기다리고 바라볼 때, 그분의 참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주님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간절한 기도가 여러분의 가리워진 길을 보이게 해 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