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주간 화요일. 사무엘 상 1,9-20; 마르코 1,21-28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위기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이제 막 세례를 받았건, 5-10년이 되었건, 30년이 훌쩍 넘었건 간에 신자가 되면 이런 위기의 순간이 꼭 반드시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런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넘기시고 있고 어떻게 넘기셨습니까? 예전 사막에 나가 홀로 굴을 파서 집을 짓고 살던 사막의 교부들의 금언집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수도승이오. 왜냐하면 자기 자신 홀로 하느님과 밤낮으로 말씀을 나누기 때문이지요.” 과연 위기의 순간이 왔다면 그동안 주님과 소통은 어떻게 해 오셨습니까? 그것이 위기를 넘기는 관건이 될 텐데요.
오늘 독서에 아들이 없던 한나가 마음이 쓰라려 울면서 주님께 기도합니다.너무 오랫동안 기도를 했던 탓인지 사제 엘리는 그녀가 술에 취한 줄 착각합니다. 허나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저는 너무나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한나가 열심히 기도했지만 그녀의 한계란 오직 그녀 자신의 상태만 보았다는 점입니다. 참된 기도란 기복신앙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선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아빌라 데레사가 말했듯이 ‘친구 사이처럼’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럴 때 자신 ‘홀로 있음’이 마침내 ‘둘이 되는’ 결실을 얻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연결이 되는데요. 한나는 분명 한계가 분명 있었지만 참 다행스러웠던 점은 그 와중에서도 지치지 않고 매달렸다는 점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조금 매달려보고 안되면 포기합니다. 그러면서 섣부른 판단을 내립니다. 복음에 주님이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면서 더러운 영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분은 평소 하느님과 연결된 삶을 사셨기 때문인데요. 그 연결성이 두려움 없고 지치지 않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태생적 눈먼 이를 보면서 제자가 묻습니다. “과연 누구의 죄 때문에 저이가 눈먼 이로 태어났습니까?” 라고요. 그러자 당신은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라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드러나기 위해서..”라고요. 내가 볼 수 있는 시각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당장은 모르지만 이것이 어떻게 흘러갈지 무슨 의미로 내 마음을 울려줄 지 봐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당신의 뜻에 대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