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8주일, 군인주일
어릴 때였습니다. 젊으셨던 제 어머니는 뭘 그리 바칠 기도가 많으신지 성모님 앞에서 초를 켜놓고 손에는 묵주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기 힘들었던 시절, 기도밖에 달리 매달릴 곳이 없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의미를 모른 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던 저는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청원의 9일기도 3번인 27일, 감사의 9일기도 3번인 27일. 도합 54일의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한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청원의 27일이 지나 네가 바라는 기도가 안 이뤄지더라도 감사의 기도는 해야 해’ 라고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란 것이 안 이뤄졌는데 감사를 하라니..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렇게 해봤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는 내가 바라는 방향에서만 이뤄지는 일방적인 기도가 아니라를 것을요. 다른 방향을 통해서 이뤄짐을 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공감을 하시는지요? 우린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여기에 예전 우화가 생각납니다. 아침에 아버지가 아들을 깨우고 있습니다. "얘야, 일어나거라!" "일어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아버지가 소리칩니다. "일어나, 학교 가야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요." "왜 싫어?" "세 가지 이유 때문에요. 첫째로 거긴 너무 시시하고요. 둘째로 아이들이 성가시고요. 셋째로 전 학교가 싫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럼 난 네가 왜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하는지 세 가지 이유를 말해 주마. 첫째 그건 네 의무이고, 둘째 네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고, 셋째 넌 그 학교 교장이기 때문이야." 기도를 하고 싶지 않아도, 감사를 표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이유란 뭘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사람들은 주님께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1독서의 이방인 장수 나아만은 피부병에 시달렸지만 엘리사 예언자를 통해 낫게 됩니다. 사실 엘리사가 해준 것도 없습니다. ‘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와라’ 는 말뿐입니다. 좀 차분하게 만져주면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심부름꾼이 전해준 말만 듣게 되니, 여기에 나아만은 흥분합니다만, 기분이 상했음에도 그는 자존심을 숙이며 강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낫습니다. 이에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복음의 예수님도 낫게 해달라는 나병환자를 만나지만 별로 해주시는 것도 없이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는 말만 듣다가, 순간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고 돌아와 감사를 표합니다. 순간 불친절한 주님과 예언자의 모습에 기분이 언짢을 수 있습니다. 친절하지도 않고 정성도 없어 보이니까요. 하지만 이해할 점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서로 다른 민족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정황상 꼭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친절의 정도를 베풀 지 않아도 상관없는 상황도 이해해야 합니다. 이방인끼리 왕래를 하지 않던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부탁을 들어줬고요. 그래서 나았고, 감사를 표합니다. 병이 낫는다는 말은 달리 말해, 해방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2독서 말씀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란 말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어느 것도 방해가 되지 않기에 내가 기대한 차원을 넘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엔 물리적인 시간도 포함됩니다. 내가 생각한 ‘바로 지금’ 만이 그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오늘은 군인주일입니다. 군인이 군인다울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위해, 자기 수하의 부하를 위해, 희생할 각오로 살아갑니다. 당장에 이해되지 않는 명령이더라도 그걸 따르며 그들은 자신의 신원성을 알아갑니다. 그래서 지난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는 야전병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전병원이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이들을 돌보듯, 상처입은 이들에게 다가가 치유하고 위로하는 곳이 교회라는 뜻입니다. 기도란 그런 것 같습니다. 당장에 내가 원한 것이 이뤄졌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멀리 사는 가족과 친척, 친구가 주님의 이름을 통해 빌어지는 나의 작은 기도로 인해 행복할 수 있다면, 그로인해 이겨나가고 버티고 있다면, 그것으로 우린 서로 행복해질 수 있겠지요. 그걸 알기에 우린 뜻모를, 다 확인할 수 없는 기도를 지금도 바치나 봅니다. 오늘 알렐루야의 기도문을 끝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