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예로니모 사제학자 기념일
뭔가를 활용하고, 사용하고, 설명하기 위해 어느 만큼, 어디까지 생각하시는지요? 이른바 곧이 곧대로, 가르쳐준 것만 하면 고리타분하고요. 그 너머의 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에 빠집니다. 이를테면 매일미사에 설명에 나온대로 예로니모 성인은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고 나옵니다. 그럼 여기서 교부신학과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 신학과의 차이가 뭘까요?
교부시기는 초기 교회 때 아직 신학에 대해 정립이 되어있지 않을 무렵,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의 철학을 도입합니다. 플라톤의 일자, 근원, 이데아 등을 통해 말이죠. 이것이 나중에 신비신학에까지 발전해 나갑니다. 스콜라 신학은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 한 인간의 이성을 도입합니다. 이른바 출발을 다르게 시작합니다. 하지만 정상은 똑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치 등산을 하듯이 등산로는 다 다르지만 대청봉은 그곳이듯이 말이지요. 인간의 이성을 도입했다고 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기 생각을 우선시 하진 않았습니다. 그의 중요한 말이 이렇지요.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철학이란 것도 신학의 하위부류이기에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당겼던 것 뿐입니다.
처음 예로니모 성인의 시기는 교회를 지키고 옹호하려는 시대였습니다. 다른 이민족의 신앙을 융합하기에는 좀 일렀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로니모는 광야로 들어가 수덕생활을 하며 진정 지킬 것을 지키고자 애썼습니다. 오늘 복음도 그랬고요. 독서도 그러합니다. 주님을 다들 원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매번 느끼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곧 명절이 다가오지만 종교와 생각이 다른 식구를 만날텐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외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배척하거나 또는 포기하거나 그들을 따라하다가 내 것마저 잃어버리는 사태를 만나지 않습니까? 여기에 예로니모는 자기가 가진 것을 잘 지키며 대중적인 말로 번역한 불가타 성경을 내놓습니다.
외부의 것을 잘 받아들여 자신의 것을 공고하게 지켜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다수가 외부의 것 때문에 휩쓸리곤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것을 잘 지키는 지 봐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