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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책이란 제도를 아십니까? 조선시대 영조,정조 임금 때 붕당정치의 문제점을 막으려 과도한 경쟁을 조절하려 한 인재 등용 정책이었지요. 이른바 코드 인사가 아닌 탕평(蕩平)은 치우침 없이 공평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린 치우쳐져 있고요. 한쪽으로 쏠려 있음을 봅니다. 그것이 편해서, 다른 쪽으로는 나눠주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하지만 이런 것을 보다가 오늘 독서를 읽으면 ‘하느님은 어떤 진영을 막론하고, 얽매이지 않고’ 쓰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에즈라서의 시작을 알리면서 키루스 왕이 나옵니다. 때는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 페르시아에 유배 중인 상태였습니다. 기원전 586년 경, 시작된 노예로 끌려간 이들이 기원전 538년 경 키루스 왕 때 칙령을 통해 관습과 종교를 허용한다는 유화정책을 폅니다. 그러면서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방된 것은 아니었지요. 조공은 바쳐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은 적을 통해서도 은총을 베푸시는 분’ 이라고 알아들었다는 사실인데요.
요사이 세상은 닫혀 있습니다. ‘내 말만 들어줘야 한다’ 는 방식으로 일관된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다양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보다 폐쇄성을 택하면서 ‘나 아니면 안되고, 우리끼리 아니면 안되고, 우리 민족 아니면 안된다’ 는 발상으로 점차 목소리를 높여갑니다. 여기에 우리가 아는 catholic 이란 말을 떠올려 봅니다. ‘보편되다’ 는 뜻 아니겠습니까? 서로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면서 모두 어울리는 하나의 모습, 오늘 본당의 생일을 맞이하며 하느님의 뜻은 어느 누구의 뜻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목소리, 저 목소리의 다양한 통로를 통해 온다는 사실을 보면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다” 는 말씀이 가진 자의 혜택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베푸는 이들은 지금보다 더 많이 가질 것이고, 폐쇄적인 이들은 가졌다는 그것도 없어질 것이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때,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의 폭넓음으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