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3 주일미사. 지혜 9,13-18; 필레몬1,9-17; 루카 14,25-33
여러분 지혜롭기를 바라십니까? 모두들 그러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지혜로움이 실제로는 계산적인 상황에서 멈추곤 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보지 않느냐?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 지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아주 당연한 말이지요. 먼저 상황파악을 따져보는 것은 지혜롭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수준의 이야기나 들으려 여기 모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차원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모였는데요. 1독서에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고 말한 것처럼 감히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에 그냥 거기서 덮어버리는 것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지혜로운 일일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늘의 명을 따르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겐 어제도, 내일도 없답니다. 이미 영원한 오늘. ‘the eternal now’를 살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나이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말했습니다. 이는 하늘의 섭리나 자신의 삶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는데요. 그런데 우린 왜 그게 어렵게 느껴질까요? 히브리서 11장 3절 말씀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시각장애인이 아닌 데 여전히 무엇을 보지 못한다는 걸까요? 오늘 독서에 나옵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고백을 할수 있을 때 지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자기의 한계를 알고, 나의 차원을 넘는 분을 만날 때, 내가 진정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됩니다. ‘내가 믿는 분의 힘과 영을 만나야만 내 삶을 개선시켜 갈 수 있습니다.’ 라는 고백이 저절로 될 때, 삶이 제자리를 잡는데요. 여러분들은 큰 신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신(神) 중에서 가장 큰 분이신 하느님. 그런 큰 신을 모시고 사는 우리가 지혜로움을 얻고 싶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린 이런 말을 합니다. ‘가족이 잘되려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제 조건이 다르면 결론도 달라지는데요. 뭘 얻으려고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니라, 나의 것을 버리고 먼저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를 때에야 비로소 얻게 된다는 말인데요.
제가 아는 신부님 이야깁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 그분은 연세드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외아들은 아닙니다. 3형제 집안의 막내입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이 부모님 모시기를 꺼리다 보니, 모든 것을 버렸다는 신부님이 어머니를 챙기게 되었고요. 결국 효자는 다른 형제들이 아닌 신부님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처음엔 신부님은 신부의 삶을 살고자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세상 용어로 불효자지요. 하지만 떠남이, 반대로 어머니의 모든 사랑을 차지하게 되었는데요.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살리고자,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당신을 바치셨기에 결국 모두를 살리시지요. 그러면서 당신도 부활하시고, 우리의 죄도 씻으시고, 영원한 삶을 보여주셨지요.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움이 아닐까요? ‘하늘의 명을 따랐기에 이미 영생을 산다’ 는 앞서의 말처럼 인위적으로 뭘 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정리했기에, 오히려 채워주시고 사랑받음을 말씀하시는데요. 현실적으로 태생적으로 부족하게 자라면,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결핍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지요. 부족함을 맛봤기에 크면 자꾸만 채우려 듭니다. 마치 어릴 때는 가난해서 장난감을 가지지 못했던 아이가, 커서 경제적으로 좀 나아지니 뭔가를 자꾸 사들이거나 채우는 것처럼 결핍을 보충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린 또 압니다. 그것으로 인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저 잠시 마음의 위안일 뿐이지요. 그런 갈증은 다른 곳에서 또 뿜어져 나올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우리도 진정 살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를 내어놓는 희생이 필요하겠습니다. 그것은 당장의 손해가 아니라 다음을 위한 발판이 되어줄 것이니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