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6주간 금요일
세상을 자기 생각대로만 보면 그것이 벌어지는 이유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생각보다 사람은 복잡한 구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심한 표현이지만요. 우리가 교회의 가르침을 뻔하게 여기는 뭘까요? 선과 악, 죄와 벌 등이 너무 명확하게 보인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이냐? 아니냐?에 대한 선택지에서 꼭 모범답안을 따르지는 않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판단함에 있어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는 측면이 아닌, 자기 파괴적인 것을 선택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답을 알면서도 그걸 선택하지 않는 경우’ 가 있다는 것이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생은 다른 곳에’ 에 보면 주인공인 젊은 작가 야로밀은 우울해합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 욕망을 쫓으며 살아갑니다. 욕망만이 그를 움직였고요. 다 가질 수 없는 사랑을 원했고요. 그러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인정받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알게 됩니다. 그 욕망은 ‘결핍에 따른 탐닉’ 이었다는 사실을요. 욕구를 원하지만 다 가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몸부림치면 칠수록 자기 삶이 복잡하게 꼬여 갔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결핍이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었고요. 실패할까봐 두려워했으며 그로인해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이들은 ‘회개하지 않음’ 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옵니다. 왜 하느님을 거역하고, 예언자들을 거스르고, 자기의 악함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그런 이유는 자기를 보호하려는 방법이었음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우리도 그럽니다. ‘기도는 힘들어. 하느님 마음에 들긴 어려워. 남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해’ 라고 여기며 성공하기 어렵다고 여겨서 반대로 가거나, 목표치를 확 낮춰버립니다. 그래야 걱정을 덜 수 있으니까요. 왜 이럴까요? 자존감이 낮아져 그렇습니다. 자기는 늘 생(生)이 어렵다면서 그 어려움을 합리화하고 당연시 여기거나 성과를 이루는 일에 치중하면서 일에 묻혀서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택합니다. 혹은 포기하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린 뭔가를 자꾸 하려는 것보다는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포근함과 편안함을 느낄 필요가 있음을 봅니다. 사랑이 뭔지 모르는 아이는 자꾸 자기식대로 뭔가를 하려듭니다. 일부러 사고를 치면서 관심을 얻어내는 시도처럼요. 교회를 잘못 알아듣는 이들이 그래서 생깁니다. 답답한 윤리 교과서처럼 여겨서 오히려 ‘삐뚤어질테다~’ 라는 행동을 하는데요. 소설의 주인공은 잔꾸만 자신의 삶에서 도망쳐 왔음을 깨닫습니다. 진짜를 보지 않고서 자기 생각대로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린 나에게 주어진 것을 잘 받아들일 때 나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너무 자신을 몰라서 자기 파괴에 이르는 것을 관두고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통해 들려오는 내 안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으면서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