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2025. 8. 6. 오후 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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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모든 것을 말이나 글로 다할 수 없음을 이해하십니까? 또는 최선을 다해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바로 이것이다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우리가 하는 표현은 그 본질의 자체의 적확함을 다 다루지 못할 때가 많아 보입니다. 표현이 곧 그 자체는 아니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다루고 신의 영역을 다루는 이들이 많은 저술을 써내고, 강연을 하지만 정작 그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만날 때가 있곤 합니다. 즉 자기를 넘는 부분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변모하신 날을 기념하면서 성경 표현상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였다 하는데 과연 그것으로 전부 설명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건 그저 외적인 표현이고요. 그 표현도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독서의 다니엘 예언서도 그렇습니다. 신비로운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분의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린 무엇을 짚고 넘어가야 할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다는 점입니다. 성녀 대 데레사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늘 내 옆에 계시는 것 같았으나 상상적 현시가 아니어서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줄곧 내 오른편에 계셨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의 증인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그로인해 성녀는 오직 그분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고요. 그렇게 뵙는 현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짧지만 강렬한 체험의 시간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기에, 늘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했습니다. 이게 기도하는 이유요, 묵상의 힘이라 할 수 있는데요. 체험을 통해 말로 다 표현 못할 안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간을 잠시나마 해 본 이들은 베드로가 말한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 는 약간은 엉뚱한 말이 나올 수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무 강렬하기에 이성을 너머서기 때문이지요. 물론 여기에 대한 정리작업은 공동체를 위해 사후에 필요하지만요. 주님의 크고 아름다운 사랑을 만나길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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