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3주간 수요일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무엇무엇보다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화합보다 거절을, 친교보다 공동체를 떠나는 것을, 동반보다 따돌림을 원하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이른바 그들끼리의 ‘끼리문화’를 선택합니다. 이로써 명확해집니다. 그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남들에게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선함보다 악함을 선택하는 이들은 분절을 선택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잖습니까?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없다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악마가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결국 하느님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악함이 먼저 나온 것이 아니지요. 선함의 모자람이 악이 되면서 덜 선한 것을 찾지요. 독서의 사라도 그렇습니다. 질투로 인해 모자를 내쫓는 말을 합니다. 정실부인의 입장에서 후처와 그의 자녀는 쫓아내는 일이 드라마나 실제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지만 먹고 사는 것마저 불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하느님은 그렇데 되도록 놔두시지 않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우유부단했어도 말이지요. 화답송에 나오잖습니까?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주셨네” 여기에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저 다치지 않으려, 상처 입지 않으려, 도움의 손길을 거두고 주저하는 현실을 보곤 합니다. 여기에 내미는 이들의 손길은 참으로 소수(小數)입니다. 예부터 세상은 다수들만이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참된 사랑을 믿는 소수들이 주님 사업에 동참하여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주님과 상관이 있는 우리가 이제 무엇을해야 할까요? 모두에게 베푸는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