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두 가지 이야기를 하며 시작하겠습니다. 첫번째로, 유럽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분들은 놀라워하며 부러워합니다. 웅장한 성당의 크기에 압도되고, 더불어 엄청난 많은 수의 성물과 성상 등이 멋지게 전시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끔 교우분 중에는 그런 성당을 부러워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여기서 질문드려보겠습니다. ‘왜 유럽인들은 그렇게 엄청나게 표현하려 했을까요?’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뭔가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느님의 은총은 아니지요. 두 번째로, 1987년 삼성그룹이란 기업을 만든 총수인 이병철 회장이 2년째 폐암으로 투병하며 타계하기 전, 당시 절두산 성당 박희봉 신부님께 질문지를 보냅니다. 내용은 이러했답니다. ‘인간인 이상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다지만 무신론자로 살면서 투병하는 와중에 궁금한 것이 있다. 신은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사람에게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등의 24가지가 적힌 질문지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죽음이 더 빨랐기에 대답을 듣지 못하고 떠났지만, 그 질문만은 날카로운 것이었기에 이를 가지고 차동엽 신부님과 조규만 주교님은 이에 답변을 달은 책을 내십니다. 여기서 또 질문을 드려봅니다. ‘그는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아왔지만, 죽음을 앞두고서 왜 그답지 않게 신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까요?’ 여기 계신 분들은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시원하게 답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왜 현실은 그러지 못할까요? 배운 게 많이 없어서요? 교리 지식이 부족해서요? 그건 답이 아닐 겁니다.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차원을 넘는 문제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도 죽음을 앞두고 느꼈겠지요.평생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인간의 한계를요. 그렇습니다. 우린 모르는 분. 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분을 만나고 있기에 감히 답변이 쉽게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내가 그 분야에서 일하니 잘 알고 있다. 내가 해봐서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말씀을 하는 본인보다 더 전문적인 분을 만나봤나요? 그러면서 생각이 달라진 것을 경험해보셨나요? 세상은 넓고, 뛰어난 인재도 풍부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참 평범하구나, 난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면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경외심입니다. 지난 주 성령강림대축일을 통해 만난 성령의 7가지 은사 중 하나이면서, 나를 뛰어넘는 것을 만나며 드는 두려움입니다. 나의 현실을 봤으니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제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을요. 요사이 TV, 인터넷 등에서 나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여러 사안을 설명하곤 합니다. 하지만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제대로 알면서 저런 말을 하는건가? 아니면 아는 척을 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논리학과 언어철학의 창시자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유명한 말을 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자기를 넘어서는 것을 만났을 때, 우린 압도당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이지만 또한 한 분이시다. 란 뜻이지요. 그래서 오늘 제대꽃도 그걸 상징하고자 세 가지 줄기가 하나로 연결되게 장식해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었다고 이해하는 건 아니지요. 여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모든 인간이 하는 말이나, 행동, 표현은 실상 그 의도와 다르게 표출될 수 있고요. 사람이 갖는 한계 때문에 늘 부족한 표현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족한 이해심, 짧은 생각이나 식견 등도 여기 한몫을 하지요.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 표현을 하더라도 유비적인 표현, 즉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할 수 밖에 없는데요. 왜냐하면 그 표현이란게 그분과 꼭 같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아직은 이해하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뜻이죠. 1독서의 잠언에 지혜가 말씀합니다. “심연이 생기기 전, 산들이 자리잡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그분은 언제부터 계셨을까요? 유명한 욥의 구절이 있지요. 고통에 빠진 그가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 내가 왜 이리 힘들어야 하냐?고요. 그러자 하느님은 오히려 되물으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세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언제고 동이 트는 것을 명령해 본 적 있느냐?..” 대답 못하지요. 할 수가 없지요. 주님은 우리와 스케일이 다르시니까요. 그러면서 동시에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우리의 무지함을 말이죠.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개인적으로 질문을 던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안셀무스의 유명한 말로 마치겠습니다. ‘믿기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먼저 믿으며 되어가는 걸 만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