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성당을 다니면 ‘뭘 하지마라’ 라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금지의 용어를 듣다보면 괜히 위축이 들거나 또는 반대로 더 해버리는 일탈을 저지르곤 합니다. 예전 없이 살 때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여건이었으나 이제 형편이 되고, 나이가 먹었으니 뭐가 두려울까요? 절제는 해야 하지만 잘못된 절제는 정작 ‘누릴 수 있는 환경’ 이 마련되면 충동에 휘말리게 됩니다.
신부나 수도자들은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짓고 훈련을 받다보면 가끔 문제가 발생하곤 합니다. ‘내가 진정 원해서 절제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금하니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신부가 되거나, 나름의 목표를 이루면 이제 본전을 찾으려 들 듯 참았던 게 봇물이 터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덕 교과서처럼 ‘그러면 안된다’ 는 등의 말은 와닿지 않습니다. 해왔던 절제가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 긍정하며 참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억눌린 상황에서 해왔기 때문입니다. 이건 교우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인데요. 이제 무엇이 필요할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 이란 문헌이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의 가르침은 복음처럼 몸의 아름다움에 대해 마치 음란마귀가 씌인 것처럼 가르쳐왔습니다. 하지만 진정 말하고픈 건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몸은 하느님의 영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외면의 아름다움을 논하기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몸은 특히 알몸은 부끄러움이나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알리는 도구이며 이는 자신에게 또는 상대에게 주는 증여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을 통해 뭔가 하니 말이지요. 그걸 안다면 더 이상 육체의 눈으로 사람을 보지 않게 됩니다. 서로를 소유함이 아닌, 서로를 내어주는 몸이니까 말이지요. 마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자신의 몸으로 다른 나라게 가서 선교를 표현했듯이요. 독서의 질그릇도 그렇습니다. 질그릇은 소박하고요. 멋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담으면서 그 음식의 소중함과 고귀함을 알립니다. 물론 우리에게 욕망의 눈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하고 휘둘리지 않을 때 회사나 단체 내에서 남녀가 섞여있더라도 더 이상 성적인 눈으로 보지 않고 서로를 칭찬하게 됩니다. 그가 있어서, 그녀가 있어서 가능함을 발견하니까요. 행복선언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서로를 그렇게 봐줄 때. 우린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