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2025. 6. 13. 오전 1: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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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성당을 다니면 뭘 하지마라 라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금지의 용어를 듣다보면 괜히 위축이 들거나 또는 반대로 더 해버리는 일탈을 저지르곤 합니다. 예전 없이 살 때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여건이었으나 이제 형편이 되고, 나이가 먹었으니 뭐가 두려울까요? 절제는 해야 하지만 잘못된 절제는 정작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 충동에 휘말리게 됩니다.

 신부나 수도자들은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짓고 훈련을 받다보면 가끔 문제가 발생하곤 합니다. 내가 진정 원해서 절제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금하니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신부가 되거나, 나름의 목표를 이루면 이제 본전을 찾으려 들 듯 참았던 게 봇물이 터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덕 교과서처럼 그러면 안된다는 등의 말은 와닿지 않습니다. 해왔던 절제가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 긍정하며 참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억눌린 상황에서 해왔기 때문입니다. 이건 교우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인데요. 이제 무엇이 필요할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이란 문헌이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의 가르침은 복음처럼 몸의 아름다움에 대해 마치 음란마귀가 씌인 것처럼 가르쳐왔습니다. 하지만 진정 말하고픈 건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몸은 하느님의 영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외면의 아름다움을 논하기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몸은 특히 알몸은 부끄러움이나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알리는 도구이며 이는 자신에게 또는 상대에게 주는 증여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을 통해 뭔가 하니 말이지요. 그걸 안다면 더 이상 육체의 눈으로 사람을 보지 않게 됩니다. 서로를 소유함이 아닌, 서로를 내어주는 몸이니까 말이지요. 마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자신의 몸으로 다른 나라게 가서 선교를 표현했듯이요. 독서의 질그릇도 그렇습니다. 질그릇은 소박하고요. 멋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담으면서 그 음식의 소중함과 고귀함을 알립니다. 물론 우리에게 욕망의 눈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하고 휘둘리지 않을 때 회사나 단체 내에서 남녀가 섞여있더라도 더 이상 성적인 눈으로 보지 않고 서로를 칭찬하게 됩니다. 그가 있어서, 그녀가 있어서 가능함을 발견하니까요. 행복선언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서로를 그렇게 봐줄 때. 우린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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