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2주간 월요일
사람은 보통 무난한 것을 좋아합니다. 업무에선 ‘전례(典例)가 없다’ 거나, 법정에서는 ‘판례(判例)가 없다’ 는 말로 갑작스런 행동은 잘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것에 상관없이 부르시고 행하시는데요.
독서에는 아브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헌데 전제가 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그리고 가나안 땅에 이르자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하시는데 이미 그 땅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고 나옵니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입니까? 하느님은 무모해보이시고요. 그걸 따르는 아브람은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걸 어떤 눈으로 봐야 할까요? 게다가 복음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하시는데 매일 하고 있는 것이 남에 대한 판단인 우리들을 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사안을 단순하게 보지 마라’ 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들 자기 눈높이에서 모든 것을 보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지요. 그러다보면 실상 하느님을 원하지 않는, 자기의 현실을 마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어렵습니다’ 이런 말로 변명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제한없는 능력을 허락하십니다. 예전 SF.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것이 몇 십년 후에 현실화 되는 요즘, 인간의 한계를 규정짓는 것 자체가 더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까요? 예전 한창 미국에서 말을 타다가 자동차가 출시되었을 때, 몇몇은 자동차를 망치로 부셨던 예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없어져야 한다면서요. 사람이 하늘을 날고싶다는 라이트 형제로 오늘날 세계를 더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더 뻗어갈 수 있고, 더 나아질 수 있는데 내 삶을 한정짓는 것 자체는 신앙적인 면에서도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발전, 더 나아짐을 바랍니다. 단순히 아브람보고 ‘남의 땅을 빼앗아라’ 는 말이 아닌 것처럼요. 그렇다면 우린, 우리 자신을 어디까지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까?
신앙은 가끔은 ‘내가 어리석었다’ 는 것을 인정할 때, 제대로 된 길을 갈 수있습니다. 내 시야에 가로막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