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
한 나라의 공직자를 뽑을 때 여러 장치를 사용합니다. 예전 이력을 살피고요. 재산 정도, 범죄 이력, 여기에 청문회를 하면서 검증 장치를 폅니다. 그런데 그렇게 뽑은 사람이 깨끗합니까? 일을 잘합니까? 안타깝게도 꼭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효율성과 쓸모의 대상으로 봤기 때문인데요. 사람을 쓸모의 대상으로만 여기면 쓸모가 끝나면 더 이상 그를 품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잔인하지요. 〔오늘 계신 분들은 이별의 아픔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가족들을 쓸모로 보지 않았습니다. 도구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사랑을 품어주고 감싸주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더 그립고 아픈 건데요.〕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찾아보면 이들의 과거가 그리 깨끗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고요. 바오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으러 다닌 전력이 있습니다. 이게 납득이 됩니까? 만약 그들의 후손이 성경을 읽었다면 이렇게 외쳤을지 모릅니다. ‘성경에 쓰인 저희 조상들 과거를 지워달라.’ 고요. 그 기록은 지워지지 않고 반대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어인 일일까요?
박노해의 약점이란 시가 있습니다. 약점은 약이 되는 점 / 남들은 모자란 지점이라고 / 낙인 찍은 점이지만 / 모자란 만큼 보살피고 길러서 / 나중에 귀하게 쓰자고 남겨둔 점 // 약점이 있기에 / 그대가 와서 나를 채워주고 / 내가 그대를 채워줄 줄 아는 / 우리 상처 난 영혼에 / 겸허히 비워두신 점, 약점... 무슨 말장난 같은 얘기냐? 하실지 모르지만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약점투성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왜 뽑으셨을까요? 초세기 무렵, 교회를 이끌던 교부들은 일찍이 교회를 ‘순결한 창녀’ 라고 불렀습니다. 대단히 이율배반적인 단어지요. 순결한 창녀. 하지만 여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헌장 8항에 보면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 성령께서는 교회란 언제나 뉘우치고요, 쇄신되야만 참다운 교회라고 일깨우십니다. 우리 자신이 순결한 창녀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린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도 간음한 여인을 향해 사람들이 돌을 던지려 하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하지만 모두들 거기서 돌을 내려놓고 집으로 가지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기계화된 능력 위주의 세상에서 살다보면 착각할 수 있는 게 뭔지 아십니까? 우린 그리 능력자가 아닌데, 피도 눈물도 있는, 실수하고 늘 넘어지는 인간임을 잊는다는 사실입니다. 헌데 그것을 보지 못하면 어찌될까요?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지 못하는 세상을 살게 됩니다. 삭막하지요. 그래서 가장 가까운 가족끼리도 함부로 대하잖습니까? 그로인해 얻은 서운함, 상처가 이제 나보다 약한 이들을 향합니다. 여기서 ‘어머니이신 교회’라는 교회 용어가 떠오릅니다. 부족함을 아는 이에게 격려과 껴안아주시는 모습이 바로 교회이지요. 요새 어디서 위로와 위안을 받겠습니까?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베드로와 바오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들의 약함을 인정하시며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요. 당연히 그들은 주님께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우린 가족끼리라 할 지라도 이렇게 지냈습니다. 서로 강한 척 하며, 아프지 않은 척하면서요. 걱정끼칠까봐, 타박할까봐 말이지요. 그러다 정말 큰일이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서로를 봐줄 줄 아는 자세.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이제 그 기회는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감사를 드려야 하겠지요. 성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많은 위로와 위안을 받으시며 앞으로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