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4주간 화요일
예전에 비해 신(神)에 대해 별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관심이 없을 뿐이지, 더 강렬하게 신적인 존재를 통해 나의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비록 그게 미신이나 무속신앙이더라도요. 많이 배우건, 적게 배우건, 높은 자리에 있건, 아니건 간에 신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심리 안에는 본인들의 부족함과 나약함, 불안 등이 있으며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확증편향’ 이 있는데요.
중세 시대는 신에 대한 탐구의 시대였습니다. 참다운 존재에 대해 많은 이가 몰려들어 설명하곤 했습니다. 그중 제일 유명한 설명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증명이지요. ‘원인론’ 에 입각해 무엇으로부터 존재가 기인되었는가?를 살폈습니다. 이것이 신학의 주류가 되고 긍정신학이라고도 일컫습니다. 반면 다른 주류는 신은 ‘하나’ 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모세에게 “나는 나이다” 라며 자신을 밝히셨고요. 예수님이 “나를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알 듯이 ‘아버지와 나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부정신학이라고 일컫지요. 여기서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사람들은 분석하는 즐겨합니다. 성격을 외향형인 E인지, 내향형인 I인지 파악하려 들고요. 감성적인 P인지, 직관형인 T인지 분석하려 듭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뭘까요? 방식을 달라도, 하는 경향은 달라도, 하느님이 하실 법한 뭔가를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게 마음 안에 들어있지요. ‘난 하느님 아니니까.. 하느님처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 건 비현실적이니까.’ 라며 쉽게 단정해 버리지요. 그걸 현명하다고 믿으면서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과 일치하려 본 것이 아닌, 차이점만 보려들면서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점’ 은 무어라 설명하실런지요?
자신은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데 스스로를 거부하며 멀어진 현실은 누구의 탓일까요? 하지만 내 안의 본성은 그분을 찾으려 들지 않습니까? 내가 충만하길 바란다면 차이가 아닌, ‘내가 얼마나 그분과 닮아 있는가?’부터 봐야 하지 않을까요? 성가에도 ‘우리는 주님의 발자취를 이웃에서 보네’ 라는 가사가 있듯, 나는 그분과 뗄 수 없는 사이임을 먼저 봐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