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성모의 밤(부르심의 소명). 창세 12,1-7; 마태 2,13-15;19-23
이번 전국적인 산불 피해가 났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너무 긴박했습니다. 집에 약 봉투도 못 챙기고 나왔다는 분부터, 기르던 개, 염소를 풀어줄 시간도 없어, 그냥 다 타서 죽었다는 눈물 글썽한 이야기까지.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는 이야기에서 무엇이 느껴지시던가요? 만약 갑자기 전쟁이 난다면 여러분은 무엇부터 챙기겠습니까? 서로 피하려고 교통대란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 뻔한데 과연 도망갈 곳이 있긴 할까요?
마치 부르심도 이처럼 갑작스레 다가옵니다. 오늘 들으셨던 말씀처럼 갑자기 헤로데 군사들이 아기를 죽이러 들이닥치듯이, 아브람도 새로운 곳으로 새출발을 해야 하는 처지처럼, ‘긴박하다’ 는 표현조차 너무 느긋해보입니다. 한편 인간적으로 하느님이 원망스럽지 않았을까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면서요.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라는 말에서 안심을 찾을 수 있는데요.
요사이 인공지능은 사람이 선택하는 것을 파악하며 알고리즘을 형성합니다. 그런 계산법으로 그 사람이 다음 어떤 선택과 판단을 내릴지 미리 파악하지요. 이것이 괜한 머리를 쓰지 않아서 편한 듯 싶지만, 이는 사람이 기계에게 빌미를 제공해주는 꼴이 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간파당했다는 뜻이고요. 여기에 내맡기다보면 나는 부자연스런 사람이 되고 맙니다. 신앙인은 갑자기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에 반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자기 판단에만 가로막히면, 그저 자기가 하고픈 데로만 움직이면, 이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감옥에 갇히는 꼴인데요. 그래서 전문가들도 이런 조언을 하지요. ‘가끔은 뜬금없는 분야를 검색하라’ 라고요. 그래야 거기서 제공해준 것에서 탈피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이 갖춰지고, 편안함과 안정만을 취할 때, 주님은 일부러라도 새로운 곳으로 떠남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그로인해 정작 보지 못했던 부분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 요구는 우리의 성장을 촉진시키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던 이들은 이런 체험담을 들려줍니다.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깨달음은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을요. 정작 그 시점에는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을요. 처음엔 아브람도 요셉, 성모님도 몰랐을 것입니다. 요셉이 떠나지 않았다면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이뤄질 수 있었을까요? 아브람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자식없이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떠남’은 오히려 생명과 기회를 주는 역설적인 측면이 있었음을 그분들의 삶에서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성경의 인물들은 특히 성모님의 삶은, 도무지 모를 것들을 매번 만나며, 그 속에서 헤아리셨습니다. 그러다 당신의 부활과 승천 후, 그것들의 참뜻을 깨달으셨겠지요.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지금 모르겠다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접을 것이 아니라, 일단 그분이 내미시는 손길을 잘 잡고 가면서 점차 헤아려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와 그분이 바라는 종점이 보이겠지요. 참다운 행복의 종점을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