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 금요일
오늘 복음을 들으며 이런 질문이 튀어나옵니다. ‘꼭 이 방법 밖에 없습니까?’ 주님이 보여주신 구원의 방법은 오늘날 시각으로 볼 때 불편한 기색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잠시 분위기를 바꿔보지요. 우리나라와 달리 동남아, 베트남은 논농사를 3모작도 합니다. 물론 예전과 달리 우리나라도 벼품종을 개선했고요. 시설작물까지 3모작을 할 수 있지만, 예전 우리나라는 1년에 한 번만 벼농사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그만큼 덥기 때문이지요. 그럼 땡볕은 고마운 것이겠네요? 더 많은 농산물을 만들어주니까요. 사람들은 폭염을 원치 않지만 곡식을 무럭무럭 자라게 한다면 이를 꼭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지요. 그로인해 많이 먹을 수 있기에 감사해야 하는데요. 이렇듯 자기 생각에만 갇혀있는 도시인에게 역설적이고도 선문답같은 질문의 던짐은 생각을 달리 갖게 해줍니다.
예전 800년경 사람인 동산이란 스님과 제자가 이런 말을 주고받습니다. (洞山; 807~869) 제자가 묻습니다. ‘추위나 더위를 어떻게 피하는 게 좋습니까?’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면 되겠지!’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추울 때는 추위에 뛰어들고, 더울 때는 더위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거기에 뛰어들어 푹 잠길 때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있는데요. 사실 선문답은 탈 상식적이고 논리를 초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기준은 있습니다. 여기엔 집착을 벗어야 하고요. 욕심을 제거해야 하고요. 마음으로 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관습에서 나온 옛 생각에서 탈피할 수 있는데요.
오늘 예언서는 말합니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 없이 존귀해지리라.” 그런데 방법이 내 맘 같지 않습니다. “그의 모습이 사람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같지 않게 망가져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우리가 원치 않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이제 아시겠습니까? 수난은 그야말로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 들어간 이는, 사랑이 가득하기에 일부러 뛰어드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해결해주십니다. 그야말로 고통스럽지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역설은 중요합니다. 1. 역설은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도전합니다. 역설은 가진 신념을 재평가하게 심층적인 비판적 분석을 촉진합니다. 2. 복잡성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삶은 종종 복잡하고 모호합니다. 역설은 이런 복잡함에서 모든 것이 흑백으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역설은 미묘한 차이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도록 돕습니다. 3. 철학적인 탐구를 하게 만듭니다. 역설은 진실, 현실, 도덕성과 같은 근본적인 개념에 대한 탐구를 자극하여 더욱 풍부한 철학적 논쟁속에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4. 창의적인 문제를 해결하게 도와줍니다. 모순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했을 혁신적인 해결책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방식은 하느님이 원하신 방법이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우리는 선호하지 않았지만 마치 곡식을 키우기에 필요한 땡볕같이 필요했고요. 이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셨기에 모두를 살리셨는데요. 그렇다면 우린 참다운 것을 살리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과감히 뛰어들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