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간 수요일
참됨은 어떻게 다가올까요? 진실은 내가 원한 방향에서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격분한 이유가 뭐였을까요?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말씀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는 둘의 갈등구조가 벌어진 것이 한편 더 부각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요한 복음사가의 저술시기는 90년~120년 사이라고 전해집니다. 공관복음이 단순히 예수님의 모습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그분의 삶을 바라보았다면 요한복음은 신적인 영역에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세대가 달라지고, 역사적인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예전과는 다른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역사적인 해석도 그렇지요. 한 사람의 평가가 다르게 해석되듯이 말입니다.
이사야서 독서 마지막도 그렇지 않습니까?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어미가 아이를 잊을지라도 너희의 생명의 주관자는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라는 말씀엣 무한한 차원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내가 이해를 다 못하니 답답하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고맙게도 그분은 뻔한 분이 아니십니다.
종교개혁 이후 신학은 계시와 영성이 분리되었습니다. 더 잘 알아듣겠다고 쪼갠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신학은 자칫 사무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영성은 알아듣기 힘들어졌습니다. 학문도 발전하면서 예전 백과사전처럼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룬 것에서 학과별로 분할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가 생겨난 것이 지금입니다. 하지만 한편 그러다보니 학문간의 교류가 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런 것을 타파하려고 생긴 방법이 수능시험이지요. 여러 분야를 골고루 오가면서 알아듣게끔 하려고요.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취지를 잃어버렸지만요. 다시 돌아간다면 이사야나 요한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로 알아듣게 하려했습니다. 신비적인 관점을 못 알아듣게 하려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감춰진 비밀을 벗기고 초대하게끔 이끄십니다.
당신 말씀의 참된 의도가 엿보이나요? 사실 표현해내는 언어는 시대의 한계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자칫 못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하곤 하지요. 그러나 당신은 “늘 일하시는 분” 이시고요. 예전부터 우릴 알고 계신 분이며, 앞으로도 그럴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안에서 영원함이 어떤 것인지 음미해야 하겠습니다.
